‘하나님의 일’은 곧 사랑
인간을 사랑했기에
예수는 기꺼이 십자가를 메어
세속의 욕심 간직한 베드로에
예수는 “사탄”이라고 질타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라면
다소 손해보는 게 교회의 자세
“남친이 정말로 날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연애 상담을 하기도 한다. 어려운 질문 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쉽다. 사랑의 진정한 속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희생’이다.
“녀석이 사랑한다고 노래를 불러대도, 만나면 문어다리처럼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아도 믿을 수 없다. 진실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쁘게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그 놈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랑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나 스스로도 겸연쩍지만, 아무튼 말은 이렇게 해준다.
정말 사랑하면 희생을 손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정말 사랑하면 갖기보다는 주기를 더 좋아한다. 정말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 “사랑할수록 바보가 되는 즐거움”이라고 이해인 수녀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시간, 에너지, 돈이 아깝지가 않다. 지치도록 주고 또 주어도 생각만 하면 미소가 나는, 그런 바보가 되는 것이 정말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하는 사랑의 모본을 우리는 사실 잘 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왔다. 또 하나의 모본을 그리스도인들은 잘 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시몬, 예수의 십자가를 지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틀이다. 자기를 죽일 그 무거운 나무 형틀을 예수는 어깨에 지고 사형장으로 가야 했다. 병사들은 예수를 한껏 희롱한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마가복음 15:20-21)
구레네 사람 시몬. 여기에 딱 한번 짧게 등장하고 다시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미스터리 인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장면을 기록한 마가는 그의 두 아들의 이름, 알렉산더와 루포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서 전승에 의하면, 엉겁결에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시몬이 후에 예수를 믿었으며, 그의 가족은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가와 그의 복음서를 읽는 당시 독자들이 구레네의 시몬을 잘 알았기에, 마가는 위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거뜬히 들고 골고다 언덕을 힘차게 올랐던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전적으로 겪어야 하는 희생 제물이어야 했기에, 예수는 여느 인간처럼 힘들어했다. 그 증거로서 지나가던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했다. 짧지만 그의 등장에는 그런 진중한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마음 깊이 생각해 볼 의의가 있다. ‘시몬’과 ‘십자가’ 이 두 단어가 상기시키는 복음서의 어느 유명한 본문이 있기 때문이다.
시몬은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유명한 시몬이 떠오른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십자가’가 있었다. 어느 날 예수는 자신이 고난을 받아 죽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당혹했기에, 심지어 스승에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을까? 이에 예수도 상상을 초월한 꾸지람을 베드로에게 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보다 더 수위가 높은 욕이 있을까?
예수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잘 아셨다.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되면 나라의 각종 보직을 맡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맘껏 누리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훈계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다름 아닌 지금의 그리스도인, 교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속의 욕심 때문에 하늘의 뜻을 저버린다면, 저런 꾸지람을 예수로부터 들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이들이다.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일인데, 성경은 한마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한다.(마태복음 22:37-39)
그런데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의 속성은 희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람의 일’처럼 누리는 삶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처럼 남을 위해 희생하고 손해 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예수는 혼쭐난 베드로 옆에서 잔뜩 겁먹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십자가는 예수만 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신앙인들도 지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복음 8:31-35) 말씀을 마무리 하시며 하셨던 예수의 명언이다. 그런데 예수가 붙잡혀 가자 시몬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한없이 울었다.”(마가복음 14:72)
그리고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은 또 다른 시몬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거부했던 것을,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고 가는 듯하다. 복음서의 이런 문학적 암시는 신학적 함의이기도 하다.
잘 사는 게 목적이 아니다
신앙을 가지는 이유를 신을 믿어 ‘잘사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는 정확히 예수께서 지적한 ‘사람의 일’이다. 물론 우리의 종교심 근저에서 복을 바라는 마음을 제거 할 수는 없다. 누구든지 복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신앙하는 이유가 복락을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누리기보다는 십자가를 지는 인생소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박한 승리주의는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다. 교회와 교인이 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 손해 좀 보면 안 될까? 주중에 텅 비어있는 교회 공간을 청소년들을 위해 내어준다면,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것 보다는 훨씬 비행도가 줄 것 같다. 주중에는 교회 주차 공간을 이웃을 위해 슬쩍 눈감아 준다면, 주민들의 행복도가 높아질 것이다. 일부러라도 져주고 손해 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빡빡한 우리 사회에 숨통이 트일 것 같다.
먼저 져라, 부활로 이긴다
예수는 먼저 지고자 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당혹해 했다. 그러나 먼저 죽으셨기에 부활의 승리도 따랐다. 지는 것이 승리이며, 이것이 신앙의 공식이다. 우리 살아가는 사회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누가 나서야 할까? 두말할 것 없이 바로 기독교인이다. 어쩌면 그러라고 이 땅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인으로 사는 것이 전혀 부담감이 없다면 잘못된 일이다. 신앙은 취미생활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힘들어야 정상이다. 사랑하는 일은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손해 보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서 희생이라곤 찾아 볼 수 없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남친에게는 한마디 하시라. “사탄아 물러가라.”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