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코네티컷 후사토닉 계곡 인근의 버려진 낙농장을 매입하던 때, 그의 꿈은 야무졌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농장에서 뛰놀며 당근과 호박과 토마토를 수확하던 기억을 이제야 내 손으로 재현하게 되었구나, 햇살 내리쬐는 들판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물리도록 누려야지. 하루 평균 90분 정도밖에 햇빛이 들지 않는 뉴욕의 아파트에 살며 오매불망 짙푸른 야생을 그리워하던 마이클 폴란은 당장 텃밭 가꾸기에 돌입했다.
스물여덟 살, 전도유망한 청년 학자로서 범상치 않은 글발을 날리던 그 시절의 폴란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월든 호숫가에 3년 간 은신하며 호미와 곡괭이보다 잡초와 벌레를 더 사랑했던 사내. 한 해 콩 농사쯤 망치면 어떠랴. 무성한 풀들이 새와 곤충에게 맛있는 먹잇감을 제공한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농장에 짐을 푼 폴란은 다짐했다. 정원에는 이랑을 만들지 말고 다년초 식물과 잡초가 더불어 사는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내 몫만 고집하는 건 우아하지 않을 뿐더러 소로의 후예로서도 부끄러운 짓이니까 말이다. 야심찬 계획은 채소 모종을 심은 다음날부터 어그러졌다. 땅다람쥐가 나타나 애써 심은 모종을 잘 차려진 제 밥상인 양 먹어치웠다. 정원 식물들과 사이좋게 자라줄 거라 믿었던 잡초의 생명력은 또 얼마나 무서운지 며칠 지나지 않아 폴란이 심은 채소들을 죄다 가려버렸다. 박테리아와 진딧물의 공격도 만만치 않아서 벌레 먹은 화초들은 꽃을 피우지 못했고 토마토는 서리가 내리도록 익지 않았으며 잔뜩 기대하고 수확한 당근은 엄지손가락보다 가느다란 잔뿌리 신세를 면치 못한 상태였다. 처참한 실패를 손에 쥔 마이클 폴란은 마침내 폭발해서 욕설을 퍼붓는다. “아무렴 즐겁고 말고, 헨리 소로 양반. 그 다음엔 굶어죽는 거야.”
폴란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첫 농사의 쓰디쓴 실패를 곱씹으며 겨우내 절치부심한 그는 봄이 오자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 거친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퇴비를 섞어 땅을 부드럽게 하고 이랑을 새로 만들어 주었더니, 그해 여름 당근은 오동통한 담황색 어깨를 밀어올렸다. 셔츠에 흙을 문질러 닦고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신선하고 달달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당근다운 당근’의 맛과 향이었다. 어설픈 낭만을 걷어낸 폴란의 땅은 점점 더 재밌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너무 인위적이라서 꺼리던 기하학 형태의 화단을 만들어 장미와 튤립을 심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번번이 무력화하는 습지와 더 이상 대치하지 않는 지혜도 얻었다.
폴란이 세계적인 저술가로 부상하기 전 그러니까 먹을거리와 환경문제에서 독창적인 대안을 내는 거물로 성장하기 전, ‘세컨 네이처’라는 제목으로 낸 책은 바로 이 시기의 즐거운 부대낌을 들려준다. 7년 간 땅을 일구고 가꾸며 그는 프로 정원사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터득했을 터, 나는 폴란의 눈부신 지성과 사유를 싹 띄우고 단련시킨 토양이 바로 이 시기라고 믿으며 열렬히 질투해왔다.
그러다가 지난 연휴, 고향에 들른 내가 소박한 기회를 잡았다. 엉겅퀴와 개망초가 무성한 고향집 옆 노지를 밭으로 개간한 것이다. 동생과 조카들과 부모님을 꼬드겨 풀 뽑고 쇠스랑으로 땅을 돋운 뒤 퇴비 주고 이랑까지 만들었다. 아버지는 “네가 시작한 일이니 이곳은 네가 책임져라” 하셨지만, 나는 돌아서서 채소 이름만 줄줄이 읊어댔다. 아삭이고추, 오이, 깻잎, 가지,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조선호박···.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새 모종을 다 심으셨다고 했다. 그러니 2주에 한 번 꼴은 내려와서 밭을 돌보라고. 으하하! 어금니 질끈 물고 나도 한번 해볼 참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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