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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준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길 걷게 한 운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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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준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길 걷게 한 운명의 노래”

입력
2018.05.10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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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기념음악회서 초연 예정

원곡 가사 쓴 황석영의 아들

“아버지 집필실에 모인 손님들

목소리 낮춰 연습하던 기억 나

음악적 방황할 때 버팀목 된 곡

맑고 아름답게 재탄생시킬 것”

황호준 작곡가는 “작품을 쓸 때 지금 시대에 맞춰 어떻게 5.18정신을 기록해야 하는가, 남은 우리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특정 지역,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눌 중요한 가치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주성 기자
황호준 작곡가는 “작품을 쓸 때 지금 시대에 맞춰 어떻게 5.18정신을 기록해야 하는가, 남은 우리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특정 지역,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눌 중요한 가치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주성 기자

“작곡 위촉 전화 받았을 때 바로 하겠다고 말했죠. 제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들어야 했던 노래였으니까요.”

8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작곡가 황호준(46)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작곡가로서의 삶을 결단하게 된 계기”가 된 이 노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킨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와 1978년 말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숨진 노동운동가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의 마지막 삽입곡이다. 작곡가 김종률의 음악에 백기완의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와 대사를 썼고, 1981년 황씨 집에서 녹음됐다. 올해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 대중화 세계화 작업의 일환을 시작하며 작가 황씨의 아들 호준씨가 이 곡을 관현악 서곡으로 만든다. 황씨 외에도 김대성(교성곡), 박영란(협주곡), 마이클 도허티 작곡가도 위촉을 받았다.

황호준 작곡가는 “위촉 전화를 김종률 선생께 받아 단번에 수락했지만, 최근 작곡한 작품 중 가장 힘들게 작업했다”고 그 동안의 중압감을 에둘러 말했다. “올해 초 제주 4ㆍ3사건을 기린 무용극 ‘지달립서’ 음악을 만들고 탈진 상태에서 위촉을 받았어요. 잇달아 ‘임을 위한 행진곡’ 서곡을 만들게 됐으니 마음이 무거웠죠. 작곡가가 그런 사건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어땠을까를 떠올리는 게 힘들었죠.”

아들 황씨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10여 년전부터 음악을 전공하게 된 계기로 5ㆍ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꼽아왔다. 그가 유년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건 아버지 황씨가 장편 ‘장길산’ 집필을 위해 1978년 광주 양림동에 거처를 마련하면서다. “(음악을 전공하는데)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서재에 LP판이 전집처럼 많았는데 베토벤, 바흐는 물론이고 20세기 작곡가 음악까지 클래식을 좋아하셔서 자주 트셨죠. 당시 저희 집을 자주 드나든 분들이 노래하는 분, 전통소리 하는 분, 마당극 하는 분들이어서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했죠. ‘임을 위한 행진곡’ 녹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작곡가 황호준. 김주성 기자
작곡가 황호준. 김주성 기자

광주로 이사온 지 2년 후 5ㆍ18이 발발했다. 당시 초등 2학년이었던 아들 호준씨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기독병원을 어머니 손잡고 항쟁 내내 3번” 찾아갔다. “집 뒤쪽이 야산이었는데 밤새 총소리가 났죠. 집 2층에서 광주 MBC가 불타는 장면도 생생하게 봤고요. 어머니가 저를 안아 올리면서 ‘방송국이 타고 있다’고 설명해주셨던 것도 기억나요.”

노래극 ‘넋풀이’는 이듬해 운암동으로 이사 와서 제작됐다. “평소 2층을 집필실로 쓰셔서 손님들을 1층에서 맞으셨는데 그때는 손님들이 전부 2층으로 올라가셨죠. 노래 연습할 때도 소리 낮춰 연습하시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알았죠. ‘잡혀갈 일이구나’ 긴장했던 기억이 나요.”

암막 커튼을 두 겹으로 쳐 집안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방음을 한 뒤 녹음이 시작됐다. 그래도 노래극에 삽입될 꽹과리 장구 소리가 담장을 벗어나자, 이웃집이 ‘가짜 굿판’을 벌여 녹음 작업이 경찰에 발각되지 않게 도왔다. 그렇게 녹음된, “온갖 잡음이 다 들어간”의 노래가 몇 달 후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걸 보고 “음악이라는 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때로 큰 힘을 발휘하는 구나” 느꼈단다.

음악가로 성장할 때 딱 두 번의 방황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것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덧붙였다. 첫 번째 방황은 광주예고 시절. 전교조 관련 광주지역협의회라는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가 안기부에 끌려갔다 자퇴하면서다.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한국음악과에 입학했는데 “정서는 메말랐지만 연주는 심금을 울리는” 동년배 첼리스트를 만나면서 두 번째 방황을 했다. “작곡가로 불멸의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누구나 있잖아요. 삶과 예술이 별개의 평가를 받는 사람을 보게 되면 절망스럽죠. 그 시기에 민중가요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 거리에서 불리는 걸 보고 음악을 ‘수용자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됐죠. ‘개개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꼭 필요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 이후에는 관념적인 작곡가에서 예술노동자로 태도가 바뀐 것 같아요.”

오는 18일 공개되는 관현악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는 이런 마음을 담뿍 담았다. 황 작곡가는 “넋풀이 중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널리 알려진 건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합창곡인데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이 곡을 관현악으로 만들 때 작곡가는 5ㆍ18의 근원을 보고, 음악을 통해 위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곡가로서 욕망, 개성적인 표현을 최대한 억눌렀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최종 진압 때까지 광주는 한편으로 ‘해방기간’이었습니다. 공수부대가 물러나고 시민자치로 운영되던 그 기간에 서로 주먹밥을 싸와 나누고 믿고 의지했죠. 공동체의 가능성을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부제를 ‘아름다운 사람들’로 정했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 주제 선율을 밝고 아름답게 재탄생시킬 겁니다.”

황씨의 서곡과 김대성의 교성곡은 18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5ㆍ18기념 음악회’에서 초연된다. 재일조선인 출신의 김홍재 상임지휘자의 지휘로 광주시향이 연주하며, 박영란과 마이클 도허티의 곡은 9월 21일 같은 장소에서 초연된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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