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광고 지난해 1038건
전철 8량 전체 도배하기도
시간당 15초 노출에 3만달러
타임스스퀘어에도 등장
중국 등 해외팬들도 가세
‘봄에 태어나서 예쁜 가봄’. 옛 골목의 담벼락이나 추억의 손때가 가득한 분식집에 연인들이 새긴 문구가 아니다. 지난 3일 오전 10시 19분 지하철 7호선 군자역. 종착역인 장암을 향해 달리는 7122호 객실에는 아이돌 그룹 엑소 멤버인 시우민(28ㆍ본명 김민석)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전철 바닥 한가운데엔 ‘6 YEARS WITH XIUMIN(시우민과 6년)’이란 문구가 세로로 적혀 있었고, 벽면엔 무대와 드라마 속 그의 사진들로 가득 찼다. 지난 3월 시우민 생일을 맞아 팬들이 기획한 ‘엑소 시우민 테마 열차’ 풍경이다.
지하철 주인공은 아이돌… 3년 새 광고 14배 ‘껑충’
8량의 전철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테마로 나뉘어 시우민의 1년으로 꾸려져 있었다. 지하철 내부 전체(8량)가 아이돌 광고로 도배되기는 처음이다. 광고비는 한 달에 3,000만원. 시우민 지하철 광고는 한 달 계약으로 진행됐다. 아이돌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팬들의 이벤트도 덩달아 덩치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아이돌 팬클럽은 지하철 광고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1~8호선 지하철역에서 집행된 팬클럽 광고 수는 1,038건으로 조사됐다. 2014년(76건)보다 약 14배나 증가했다. 열차 내부뿐 아니라 승강장, 출구로 이어지는 길목 곳곳에 아이돌 광고가 들어섰다는 뜻이다. 한국일보가 서울교통공사에 의뢰해 2014년부터 지난 4월까지 연도별 팬클럽 광고 현황을 조사한 결과였다.
더 공개적으로… 독특한 팬덤
아이돌 팬클럽의 광고는 ‘조공’(옛날 소국이 대국에게 했듯 팬이 스타에게 선물하는 행위)의 일환이자, 스타를 향한 적극적인 지지의 표현이다. 아이돌 팬들의 응원 방식은 공공의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 편지처럼 사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졌던 응원은 신문, 버스, 지하철, 커피숍 진동벨 광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아이돌 문화를 먼저 경험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팬덤 문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거나 저급하게 여겨졌던 팬덤 문화가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올라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팬클럽 광고 열풍이 뜨거운 이유는 “우리 팬들이 관계지향적인 데다 ‘생비자’(생산적 소비자)로서의 욕망이 강한”(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장)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과의 관계가 밀착돼 그들의 사회적 평판을 팬들이 자신의 위신과 동일시하고, 아이돌의 성장에 일조해 더 큰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는 바람이 크기 때문이다.
기획사 찾아가 초상권 사용 허락까지
K팝의 무대가 해외로 넓어지면서 팬클럽의 광고도 국경을 넘어섰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고층 빌딩 숲 속 번쩍이고 화려한 대형 LED 전광판엔 K팝 스타들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방탄소년단과 엑소 그리고 블랙핑크, 우주소녀까지. 옥외 광고 단가 높기로 소문난 ‘세계의 교차로’에 K팝 스타 광고가 자주, 큰 규모로 진행되자 미국도 놀란 눈치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지난해 12월 ‘좋아하는 스타 홍보를 위해 타임스스퀘어 광고에 많은 돈을 쓰는 K팝 팬들’이란 기사를 냈고, 주한미군대사관은 비슷한 시기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역대급 생일 축하 선물’이란 글과 함께 타임스스퀘어 톰슨 로이터 디지털 광고판에 아이돌 그룹 워너원 멤버인 강다니엘이 등장한 사진을 올려 이런 현상을 신기해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타임스스퀘어 중심부에 설치된 톰슨 로이터와 나스닥 옥외 디지털 광고비는 시간당 15초 노출에 3만 달러(약 3,200만원ㆍ일주일 기준) 수준이다.
이 비싼 광고판엔 ‘가왕’ 조용필까지 최근 등장했다. ‘Cho Yong Pil: The K-Pop Legend. Celebrating the 50th anniversary of debut! (조용필: K팝 전설. 데뷔 50년 축하)’란 영문과 그의 사진이 광고판에 이달 첫째 주까지 걸려 뉴욕 도심을 밝혔다. 조용필 3대 팬클럽(위대한 탄생, 이터널리, 미지의 세계) 연합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벌인 이벤트였다. 타임스스퀘어 옥외 광고를 진행한 A 팬클럽 관계자인 이모씨는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미국에선 팬클럽 광고를 하려면 아티스트의 초상권 사용 허가가 필요하다고 해 기획사를 찾아갔다”며 “사진 사용 허락 사인을 받아 관련 문서를 미국 측에 낸 뒤 광고를 진행했다”고 귀띔했다.
엑소 중국팬이 한국에서 라디오 광고까지
K팝 해외 팬들이 늘면서 한국 아이돌 응원 광고를 국내외에 내는 사례도 늘고 있다. 포브스는 타임스스퀘어 K팝 아이돌 광고를 내는 주 고객을 중국 팬들로 봤다. 중국 유명 온라인 검색 사이트 바이두에 둥지를 튼, 방탄소년단과 엑소 등의 팬클럽 연합이 주도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독특한 아이돌 팬 문화(공공 장소 광고)가 중국으로 번져”(김윤하 음악평론가) 유행이 된 결과다.
해외 K팝 팬들은 국내 광고 유형까지 바꾸고 있다. 엑소의 중국 팬들은 지난달 중순 KBS 라디오 쿨FM 프로그램 ‘키스 더 라디오’ 등에 세훈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를 냈다. 라디오에 팬클럽 음성 광고가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는 국내에서 집행된 팬클럽 광고 20~30%를 해외 팬클럽이 진행한 걸로 추정했다.
글ㆍ 사진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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