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 관계 해소ㆍ협력 공개 천명
비핵화 세부조건 타협점 찾은 듯
김영철 만나 “수십년 적국이지만
북과 함께 일하기를 희망한다“
김동철ㆍ김상덕ㆍ김학송 석방 계기
역사적 관계 개선 디딤돌 전망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9일 전격 방북해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3명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번 방북에서 목표로 뒀던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세부 조건에도 양국이 사실상 타협점을 찾은 신호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폼페이오 장관이 양국간 적대 관계 해소와 더불어 협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북미 관계가 역사적 전환의 기로에 들어서게 됐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오전 8시쯤 평양에 도착해 밤 늦게 떠나기 전까지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을 비롯해 북한 최고위급 인사를 잇따라 접촉하며 북미 정상회담 의제와 장소 등을 최종 조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장관이 김 위원장과 좋은 만남을 가졌다”고 밝혀 양측이 비핵화와 북미수교 등 빅딜식 합의에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분석된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날 오전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적국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세계를 향한 위협을 치워버리며, 북한 국민이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것은 북한이 그간 요구해온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주목된다. 김 위원장이 7, 8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과 안전 위협을 제거하기만 하면 북한 측은 핵을 보유할 필요가 없고 비핵화는 실현 가능하다"고 한 것에 호응한 셈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앞서 북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브리핑에서도 “북미 안보 관계에서 역사적이고 커다란 변화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일련의 조건을 제시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며 북미간 빅딜식 합의 도출을 기대했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날 브리핑에서 “미국의 요구가 북한이 스스로 동의한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혀, 남북미 3국 간에 비핵화 로드맵이 절충됐음을 시사했다.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그간 한국 정부가 비핵화 합의의 기본 개념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브리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위원장(chairman)’이란 정식 호칭을 붙이고, 미국의 독자 제재 대상인 김영철 부위원장에게도 “훌륭한 파트너”라고 언급한 것도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공식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기류를 반영하듯 이날 오찬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오찬을 주최한 김 부위원장은 야단스러운 태도로 폼페이오 장관과 10여 명의 수행단에게 “좋은 시기에 평양에 왔다. 봄철이고 북남 사이에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위원장은 건배사로 "미국이 우리의 성공에 행복해하기를 바란다"면서 "미국이 한반도 평화 구축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고 말했고, 폼페이오 장관도 자신과 함께 방북한 미 정부 수행단을 가리켜 "바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일할 것을 똑같이 약속한다"고 화답했다. 고려호텔 39층 행사장에서 열린 오찬에는 생선조림과 오리 요리, 붉은 포도주 등이 차려졌다.
이날 석방된 억류자는 김동철, 김상덕(미국명 토니 김), 김학송씨로 모두 한국계 미국인이다. 2015년 10월 함경북도 나선에서 체포된 김동철 목사는 북한 군인으로부터 핵 관련 자료가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와 사진기를 넘겨받았다는 이유로 간첩과 체제전복 혐의가 적용돼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 받았다. 중국 옌변과기대 교수 출신으로 지난해 4월 국가전복 적대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김상덕씨는 평양과학기술대 회계학 교수로 초빙돼 한 달간 북한을 방문했다가 출국길에 잡혔다. 김학송씨는 지난해 5월 중국 단둥의 집으로 가려다 반공화국 적대행위 혐의로 체포됐다. 김씨는 2014년부터 평양과기대에서 근무하며 농업기술 보급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과기대는 한국계 미국인 김진경 공동총장이 2010년 미국 선교 단체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대학으로 교수진 전원이 미국 또는 유럽인이다.
그간 북한은 억류자 석방을 북미 대화의 계기로 활용했으나, 핵 문제에서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아 북미 관계 진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이 비핵화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억류자 석방은 양국간 역사적 관계 개선의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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