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 ‘노멀크러시’ 화두
“‘Nobody(아무나)’로 살아도 괜찮더라고요. 사람들은 더 치열하게 살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게 더 좋은 삶이라고 당연한 듯 믿고 있지만, 전 ‘아무나’로 사는 지금의 제 삶이 꽤 만족스러워요.”
어학 학습교재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장예승(가명ㆍ26)씨는 월 급여로 세후 185만원을 받는다.
최근 연봉협상에서 2,400만원이었던 연봉이 3,000만원으로 올랐지만,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대학 동기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액수다. 서울의 한 외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장씨는 대학교 2학년까지 외교관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들어간 영재학원에서 옆자리에 앉은 중학생 언니가 교재 표지의 장래희망 칸에 외교관을 적어 넣는 걸 본 이후부터다. 외국에 대한 동경, 어감에서 풍기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느낌, 부모님이 흡족해하실 만한 사회적 지위. 외교관이 아닌 다른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는 남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 준비에 착수하자 많은 것이 생각과 달랐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부지런하고 치열했다. 자기 것에 철두철미했다. 전부 노트북을 켜놓고 교수의 말을 받아치는 외교학 수업은 대학 강의라기보다 기자회견장 같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치열한 거지? 저렇게 해서 외교관이 되면 행복해질까? 물음표들이 쓰나미처럼 내면을 덮쳤다. 마침내 도달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 ‘나는 개인적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렇다면 이 꿈은 접어야 옳지 않겠나. 장씨는 깨달았다. ‘나는 내 꿈이 뭔지도 모른 채 입시학원 언니의 꿈을 좇아 여기까지 왔구나.’
외교관 꿈을 접고 나자 진로에 상당한 공백이 생겼다. 방황이 이어졌다. 엄마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교수라는 꿈도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내 깨달았다. “교수가 되겠다는 것도 공직에 있는 것보다 자기 시간이 많으니까 그게 좋아 보였던 거예요. 저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서 순수한 기쁨을 느꼈고, 막연하게나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그게 꼭 교수일 필요는 없죠. 그러자 출판사가 떠올랐어요.”
입사 면접을 보는데 회의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저희 출판사에 다니기엔 너무 고스펙이네요.” 급여는 박봉이고 회사도 파주에 있는데, 서울에서 화려한 삶을 사는 친구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냐는 거였다. ‘일 좀 배우다 그만둘 생각이라면 피차 손해니 잘 생각해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제 입사한 지 9개월밖에 안 되지만 저는 이 일이 너무 좋고, 앞으로도 계속 출판업계에 있고 싶어요. 대학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제 친구들은 대부분 고시를 패스했거나 대기업에 다니지만, 그들과 비교하며 우울해하는 일은 저 자신이 놀랄 정도로 없었어요. 사회적 기준에선 그 친구들이 저보다 더 성공한 모습이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너무 좋거든요.”
장씨가 스스로의 삶을 성공으로 여기게 만드는 제1 원인은 보람과 재미다. 교재 편집을 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이 지켜지지 않은 부분들, 예컨대 남녀대화에서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번역문 등을 수정할 때 상당한 보람을 느낀다. 교열, 교정, 저자 관리 같은 편집자 고유업무부터 콘텐츠 기획 및 디자인, 동영상 제작까지 ‘일당백’으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다. ‘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에 ‘워라밸’(워크 라이프 밸런스)이 적절히 지켜지는 지금의 직장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부모님께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던 제게 기대가 크셨어요. 입사 이틀 후에야 용기를 내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건지 물으며 아쉬워하세요. 그럴 때마다 일하면서 느낀 제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말씀드리죠. 이제는 부모님도 조금씩 납득하시는 것 같아요. 적당한 시간 일하며 적당한 돈을 벌고, 여가에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제게는 그게 성공한 삶이니까요.” 물론 지금의 급여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장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돈을 많이 벌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하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나’가 나를 해방시켰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은 그 의미가 자명한 것이었다. 돈이나 명성, 권력을 모두 갖거나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상위 1%가 되라는 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세계의 정언명령. 특별한 것은 선이요, 평범한 것은 악이다. 가파른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려면 한눈팔 여력이 없다. 고로 친구를 넘어뜨리고 이웃을 밀쳐내는 끔찍한 경쟁은 불가피한 일. 저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면 과연 행복할 것인가, 그런 건 알지 못한다.
마침내 이 미친 가속도의 경쟁트랙에 서서히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걸까. 평범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평범한 것에 열광하는 노멀크러시(Normal+Crush)가 젊은 세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젊음은 본래 ‘평범’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의 강력한 트렌드는 온통 ‘평범함이 가장 멋진 것’임을 주장하는 것들이다. 더 이상 패션과 인테리어, 라이프스타일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한 집밥을 먹으며 평범한 촛불과 찻잔으로 집안을 꾸민들 삶이 평범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난해 대대적 유행을 일으킨 덴마크의 휘게, 스웨덴의 피카 등은 촛불과 커피, 북유럽 인테리어 소품의 소비만 진작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 소비를 추동한 열망은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의 강렬한 동경이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올해의 트렌드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꼽으며 꺼질 줄 모르는 메가트렌드임을 입증한 평범에의 열망은 이제 삶 자체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소확행’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가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쓴 신조어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 먹거나 서랍을 열면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행복이 인생을 진정 값지게 만든다는 의미다. 단순한 소비 차원이 아닌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것을 촉구하는 개념으로 노멀크러시와 일맥상통한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지난해 8월 JTBC ‘한끼줍쇼’에 출연한 가수 이효리가 초등생 소녀에게 던진 이 말은 20ㆍ30대 젊은이들에게 열광적 환호를 불러일으키며 노멀크러시를 확인시켰다. 길 가다 만난 소녀에게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 거냐’고 물은 MC 강호동의 질문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답한 이경규에게 타박하듯 던진 말이었다. 초등생 소녀마저 웃게 만든 이 말에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는 “말할 수 없이 해방감을 느꼈다” “눈물 나게 좋은 말” “역대급 카타르시스” 같은 반응이 범람했다. ‘아무나’가 되어 평범하게 사는 삶도 훌륭한 삶이라는 노멀크러시에 대해 젊은 세대가 집단적 동의를 표한 것이다.
시스템에 나를 맞추지 않겠다
강원도 대관령 하늘목장에서 양떼와 젖소 등을 키우는 관리자로 취업한 이태훈(36)씨는 방송작가 활동과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한때 연 수익 3억원을 넘게 벌었다. KBS 개그프로그램 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해 다큐멘터리 작가로 제법 이름을 알린 그는 작가일과 쇼핑몰 운영을 겸하다 2012년 친구 세 명과 광고회사를 차렸다. 이후에도 미술작가들이 만든 작품을 파는 소품 샵을 두 개나 운영하는 등 끊임없이 일을 벌였다. 개그 작가로 일가를 이루고 싶은데 자꾸 다큐 쪽에서 일해야 하는 게 스트레스이긴 했지만, 꿈과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다. 두세 개의 직업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돈과 행복이 더 이상 정비례하지 않는 액수가 400만원부터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어느 순간, 가게에 손님이 오면 짜증이 나요. 그게 딱 월수입 400만원부터였어요. 그 이상은 제가 생활하는 데 필요 없는 돈인데 그걸 어떻게든 긁어모으기 위해, 한 명이라도 더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잖아요. 다 쓸데없는 노력이었죠.”
매일 자정에 잠들어 새벽 6시면 일어난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검색하고, 포털에서 정치 사회 기사를 읽은 후 혹여나 놓칠세라 트렌드에 촉각을 세운다. 누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야겠다고까지 고민하며 온종일 자신을 괴롭히다 다시 잠자리에 눕는 일상이 1년 365일. “너무 손대야 하는 것들이 많았죠. 전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안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양떼목장 잡부로 사는 요즘에야 깨닫고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거짓 신화가 한국사회에는 창궐했다. 누구도 돕지 않고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 한번 벼랑으로 몰리면 끝장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서지 않는 방법이 성공과 출세뿐인 것은 아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지만 그 말도 점차 약발을 다해간다. ‘억울한데 왜 출세를 해야 하죠? 전 행복할 건데요.’ ‘아무나’로 살아도 제법 행복하다는 간증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라캉이라는 철학자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얘기를 했대요. 갓난아기가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 건 그러면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고, 자꾸 넘어지면서도 걸음마를 계속하는 건 가족들이 칭찬하며 기뻐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성인이 되면 남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분리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엔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 저처럼 ‘어?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닌데?’ 문득 깨닫게 되는 거죠.”
진짜 내 삶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이씨에게 목장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웠다. 경쟁 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생을 산다는 건 남들이 만들어준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고선 자유의지를 행사했다고 착각한다. 근원으로 돌아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원재료의 세계 속에서 살고 싶었다. 흙을 만지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늘목장 관리자로 20개월 된 아기를 아내와 함께 키우며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한창때와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액수의 돈을 이씨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그에게 성공이란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살아가는 평범한 삶이다. “저는 아내와 아이에게도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살자’, ‘후회하지 말자’ 그런 소리를 안 해요. 저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의 삶 말고, 자신의 삶을요.”
이 지독한 경쟁, 더 이상 싫다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는 작은 스타트업에서 사용자 데이터 분석과 콘텐츠 기획 업무를 하는 김서진(가명ㆍ29)씨는 서울 소재 특목고를 나와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했다. 2년간 신림동 고시촌에서 지내며 행정고시를 준비했지만, 경쟁에 대한 거부감이 극에 달해 그만뒀다. 대한민국에서 특목고-서울대 트랙을 탔다는 것만으로 이미 경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셈이지만, ‘무조건 열심히 해서 최고가 되고 말 거야’의 고시촌 분위기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어릴 때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어른들 말마따나 사회에서 기득권으로 분류될 만한 직업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시에 패스해 사무관이 되면 명예롭기야 하겠죠. 하지만 과중한 업무량을 감당해야 하잖아요. 대학 동기들이나 고등학교 동창들은 주로 대기업에서 일하고, 회계사나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가끔 뉴스에 어떤 기업이 성과급으로 얼마씩 줬다는 뉴스를 보면 ‘○○이 돈 많이 벌겠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제겐 그 친구들이 겪는 야근, 번아웃(burnoutㆍ소진), 회식 문화, 사내정치 같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저나 그 친구들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요. 별로 부럽지 않아요.” 김씨는 현재 3,000만원 조금 넘는 연봉을 받고 어떤 날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 어떤 날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유연근무제로 일한다. 야근은 거의 없다.
스타트업에는 그러나 일확천금의 가능성이 일말이나마 존재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네이버나 카카오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김씨는 고개를 젓는다. “스타트업에 들어온 건 회사 분위기가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게 좋아서였지 이 회사가 커지면 나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건 물론 중요해요. 하지만 그런 성취감과 성과를 위해 개인적 삶을 희생해야 하는 건 싫어요.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서울에 좋은 집을 사는 거죠. 일을 하다가 잘 되면야 물론 좋겠죠. 하지만 부와 명예를 얻는 것보다는 내 가치관에 맞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업계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에게 ‘너 정도 스펙으로 왜 카카오처럼 큰 곳에 가지 않냐’며 종종 의아해한다. 업계의 컨설팅회사 출신 이사들은 ‘빨리 더 크고 좋은 회사로 옮기거나 회사 지분을 받을 수 있는 지위로 올라가라’고 염려하듯 조언해 준다. 하지만 김씨는 “굳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억지로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는 여가에 요리를 즐기고, 미드와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지금의 제 삶에 매우 만족하는데요.” 김씨에게 삶의 만족도를 10점 만점으로 물었다. “8점이요! 월급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겠어서 2점 감점.”(웃음)
‘아무나’로 살아도 제법 행복하다고!
획일적 성공 공식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그간 열정과 재능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도 성공하기 위해 의대에 가고, 글쓰기에 열정을 품어도 우선은 로스쿨에 가야 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낭비가 지대하다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맞지 않는 시스템 속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는 과정에서 개인들이 겪어온 고통이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모두에겐 각자의 성공과 행복이 있고, 성공과 행복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항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더 이상은 묵살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외침들이 오늘날 노멀크러시 현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경쟁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했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하지만 잘못된 걸 바꿀 수는 없으니 내가 떠나겠다’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젊은 세대의 사회를 향한 조용한 복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적 사회문화로부터 탈피하려는 시도를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개 커리어나 스펙 등의 면에서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라면서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살려는 노력이 경쟁의 피로감에 시달리는 2030 세대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세대)에게는 삶의 공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강조한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벌어 가정을 꾸리는 게 그간 이견이 없는 성공의 정의였어요. 최초의 개인주의자라고 하는 X세대도 결혼과 출산의 압박은 거부했지만, 돈과 사회적 지위, 좋은 직장은 포기 못 했습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그것을 감수합니다. 기성세대가 루저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김 소장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풍요를 경험해온 탓에 경험가치를 가장 중시한다”며 “출세가 싫은 게 아니라 출세를 위해 가정이며 친구며 취미며 모두 버려야 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져 묻는다는 것이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다 1년 전 개인 목공방을 연 최은섭(가명ㆍ30)씨는 공방을 크게 키워갈 생각이 전혀 없다. 회사에 다닐 때는 연봉 1억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업무 성과가 좋았지만, 디자인이나 퀄리티에 대한 관심은 없이 수익창출에만 골몰하는 회사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회사 대표는 저택 같은 집으로 이사하고, 매장을 확장하고, 외제차를 새로 사들이며 화려한 성공 가도를 밟았지만, 최씨의 눈에는 조금도 성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테리어 회사에서는 다 지어놓은 건물에 붙박이장을 짜 넣는 정도의 일부 과정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하지만 공방은 모든 과정을 제가 주도할 수 있다는 게 좋죠. 돈은 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억대 연봉 제안도 뿌리치고 하고 싶은 일을 택했어요. 저는 저처럼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피부로 느껴요. 세상의 기준보다 자신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가고 있어요. 차마 용기가 없어 아직 결행하지 못했더라도 대부분의 마음속엔 그 열망이 있죠.”
그에게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지 물었다. “치킨이 먹고 싶을 때 고민 없이 시켜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해탈의 열반에 들자는 게 아니다. 속세를 떠날 것도 아니다. 다만 치킨 정도면 충분할 뿐이다. 함부로 루저의 삶이라고 부르는 기성세대를 향해 그들은 묻는다. ‘그렇게 많은 성공을 다 어디다 쓰려고?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최씨는 자신에게 실은 원대한 야망이 있다고 했다. “야근 없는 주5일 근무를 하는 거요. 공방이 아무리 잘 돼도 반드시!”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오희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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