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는 군사독재에 맞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전화선을 끊어 외부 연락을 차단하고 민정당의 실력자를 보내 출국을 종용했다. YS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서울대병원에 강제로 입원했지만 YS는 곡기를 끊고 끝까지 버텼다.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가택연금 해제로 이어졌고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3당 합당이 있었던 1990년 DJ는 13일간 단식투쟁 끝에 5ㆍ16 쿠데타로 중단됐던 지방자치제를 30년 만에 부활시켰다.
▦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장기표씨는 단식에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단식을 통해 요구사항이 이뤄질 가능성이 상당해야 한다. 둘째,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 단식은 약자가 불의에 맞서 선택할 수 있는 극단적 의사표현이다. 항일 독립투쟁 이래 우리 만의 독특한 정치문화이기도 하다. 군사정권 시절 야당 정치인은 단식투쟁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권력자의 양보를 요구했다. 단식이 길어질수록 진정성을 인정받고 여론의 동정과 관심도 높아진다. 민주화 이후 ‘광장’이 단식 장소로 선호되는 이유다.
▦ 2016년 9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집권여당 수장의 단식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국회의원의 단식은 특권의 시작”이라며 단식투쟁을 폄하했던 이 대표는 골방 단식을 택했다. 단식 돌입 모습을 2~3분 언론에 공개한 뒤 문을 걸어 잠갔다. 야당 의원들은 “초코파이를 먹는지, 송로버섯을 먹는지 알 도리가 없다”며 공개 장소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박지원 의원은 “푸하하 코미디”라고 조롱했다. 이 대표는 몸에 독소가 올라와 일주일도 안 돼 단식을 중단했다.
▦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3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는 “처절한 진정성을 보여 줄 것”, “다 지켜보는 데서 하겠다”며 국회 본청 앞을 농성 장소로 골랐다. 하지만 국민 반응은 싸늘하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이 지켜볼 수 있게 24시간 관찰 카메라를 설치해 달라” “모포, 담요 없이 제대로 하라”는 등의 글이 쇄도하고 있다. 단식투쟁이 성공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국민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 명분이 약하고 동정도 못 받는 단식이 오래 갈리 만무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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