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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는 ‘희생자’ 아닌 북한 체제 변화시킬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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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는 ‘희생자’ 아닌 북한 체제 변화시킬 동력”

입력
2018.05.03 2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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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이후 지나친 희망은 문제

北 변화의 힘은 주민에게서 나와

탈북자들 만나 얘기 들어보세요”

다큐멘터리 '장마당 세대(The Jangmadang Generation)' 영상 캡처
다큐멘터리 '장마당 세대(The Jangmadang Generation)' 영상 캡처

“제 이름은 주양입니다. 1991년 북한에서 태어났고, 2010년 탈북했어요.”

털모자를 눌러쓴 앳된 얼굴의 여성이 어눌한 영어지만 또박또박 화면을 향해 말한다. 주씨를 비롯해 영상에 등장하는 20대와 30대 초반 청년 10명이 떠올리는 북한은 더 이상 국가의 배급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곳이 아니다. 정부가 해주는 게 없으니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개척해야만 했던, 용감하고 대담한 청년들이 사는 곳이다.

1990년대 시장경제를 경험한 ‘장마당 세대(The Jangmadang Generation)’ 10명이 주인공인 동일한 제목의 52분짜리 다큐멘터리는 북한인권단체 ‘링크(LINKㆍLiberty In North Korea)’의 한국지부장 박석길(34)씨가 만들었다. 2012년 링크에 합류한 그는 탈북 난민 보호와 이후 정착을 돕는 링크의 기존 업무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을 대하는 인식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장마당 세대’ 제작은 그 일환이다.

“많은 사람이 탈북자를 북한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그들은 체제를 벗어날 마음을 먹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자 동시에 그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입니다.” 2일 서울 중구 을지로의 사무실에서 만난 박 지부장은 북한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지도자 한 명의 결단이 아닌 북한 주민들로부터 온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탈북자들이 그 변화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탈북자 대부분이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통화하려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탈북자들이 북한 내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한 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링크는 2004년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대학생들의 소모임으로 시작해 2010년부터 본격 후원을 통해 탈북 난민의 탈출과 정착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만 탈북 난민 156명이, 지금까지 800여명이 링크를 통해 정착에 성공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지부에 직원 22명이 근무하고 있고, 한국에는 박 지부장 등 5명이 활동하고 있다.

북한 인권 단체 LINK 한국지부장 박석길씨가 2일 서울 중구 을지로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북한 인권 단체 LINK 한국지부장 박석길씨가 2일 서울 중구 을지로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박 지부장은 함경북도 실향민 출신인 조부모와 한국인 아버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 대학 어학당에서 공부하기 전까지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국 런던정경대를 졸업하고 유엔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며 ‘만일 내가 영국이 아니라 북한에서 태어났다면’이라는 의문이 그를 사로잡았다. 북한 인권 문제가 자연스레 끌렸다.

박 지부장이 링크에 합류한 시기는 남북 관계가 경색일로던 때라 탈북자 구출도 쉽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 모드로 들어섰으니 상황이 달라질까 물었더니 “전에는 너무 희망이 없어서 문제였는데, 이제는 너무 희망이 많아진 게 문제”라고 답했다. 근본적인 체제 변화 없이 태도만 변한 상황에서 마치 당장이라도 북한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설명이 따랐다. “결국 진짜 변화의 힘은 ‘사람’이 가져와요. 김정은도 북한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제발전을 해야 체제 유지가 가능하고, 작년에 심화된 제재를 풀리기 위해 주변 국가들에게 태도 변화를 보인 거겠죠.”

통일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통일이 되면 기차 타고 유럽에 갈 수 있나’라는 막연한 생각 이전에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 인식이 먼저라고 운을 뗀 박 지부장이 말을 이어갔다. “적대도 시혜도 아닌, 북한 주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가교가 탈북자인 셈이죠. 주변의 탈북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려 하세요. 거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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