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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마추어 스타] ‘男 다른’ 정교함, 뒤돌려치기 백발백중

입력
2018.05.03 06: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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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구의 신’ 꿈꾸는 오슬지

남자친구 따라 시작 3쿠션에 매료

허해룡 선수 “도전해보자” 제안에

10년 회사 생활 망설임 없이 중단

하루 10시간 훈련해 전국대회 3위

여성 당구 동호인 오슬지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조이 빌리아드클럽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여성 당구 동호인 오슬지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조이 빌리아드클럽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당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귀족 스포츠였던 건 분명해 보인다. 유럽의 왕실에서 즐겼고, 1909년 일본을 통해 한국에 처음 상륙할 때도 ‘옥돌대’라는 이름의 당구대 2대가 창덕궁에 최초로 설치됐다. 1926년 경성신문사 내 조선박문국에서 편찬한 ‘순종국장록’에는 순종이 궁중 내실에서 당구를 즐기는 사진이 담겨있다.

1970~80년대 현대 당구는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조이 빌리아드클럽. 점심 시간을 이용해 ‘한 게임’을 즐기는 직장인들 사이로 유독 한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국제 규격의 대대(大臺)에서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며 중년 남성을 쩔쩔 매게 하고 있는 미모의 여성은 당구 동호인 오슬지(33)씨. 이미 이 곳에서 유명 인사인 그는 대대 기준 에버리지 0.7점(1이닝 평균 타수)을 치는 재야의 여성 고수다. 동호인들의 점수 기준으로 치면 300점 정도 된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큐를 들고 있는 모습만 보고 호기심에 도전장을 던졌다가 자존심을 구긴 남성들이 수두룩하다.

10년 직장 생활 그만두게 한 당구의 마법

오씨가 당구를 처음 접한 건 10여 년 전. 남자 친구의 손에 이끌려 녹색 테이블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신기하게 저는 여자들이 보통 처음 접하는 포켓볼보다 3쿠션에 매료됐죠.”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 온 건 현역 선수인 허해룡(40) 대학당구연맹 사무국장이었다. 오씨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눈여겨봐 온 허씨는 “더 늦기 전에 선수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제안했다.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지만 오씨는 미련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회사 생활을 하며 취미로 간간히 즐겼는데 늘 머리 속에는 당구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당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이 저를 깨웠죠.”

오씨는 이 곳을 운영 중인 허씨의 집중 지도 속에 지난 연말부터 하루 10시간의 강훈련을 소화했다. “하나를 배우면 될 때까지 반복 연습도 하고, 지루해지면 손님들과 경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당구 테이블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 결과 종전 0.5점에서 0.7점으로 에버리지를 끌어 올렸고, 지난 2월 출전한 동호인 대회 ‘김치빌리아드배 전국여자국제식 3쿠션대회’에 나가 당당히 공동 3위에 입상했다. ‘선수급’ 동호인들이 넘쳐나는 당구에서 보기 힘든 단기간의 성과다.

당구 테이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슬지씨. 배우한 기자
당구 테이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슬지씨. 배우한 기자

‘때’를 기다리는 백발백중 뒤돌려치기

사진 촬영을 위해 수 차례 반복된 뒤돌려치기 샷 요구에도 오씨는 자로 잰 듯한 성공률을 자랑했다. 안정적인 자세와 브리지부터 스트로크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씨는 “어려운 포지션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쉬운 포지션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라면서 “덕분에 기본적인 뒤돌려치기나 옆돌리기는 다음 포지션까지 생각하고 칠 수 있을 만큼 됐어요”라고 말했다. 허씨는 “같은 점수대라면 남자가 여자에게 절대 이길 수 없을걸요. 여자는 강한 파워를 요구하는 샷 등 고난도 기술구사에 한계가 있지만 정확도에서는 남자보다 한 수 위에 있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했다.

남다른 승부욕도 일취월장에 한 몫 했다. 오씨는 “보통은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당구를 가르쳐주는데 난 예전에 남자친구를 매번 악착같이 이겨서 나중엔 좀 미안했어요”며 웃었다. 당구 열정을 불사른 오씨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남자의 경우 선수가 되기 위해선 선발전을 거쳐야 하지만 여자는 저변 확대 차원에서 대한당구연맹에 등록만 하면 선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오씨는 “무늬만 선수는 의미가 없어요. 여자 동호인대회에만 선별적으로 출전해 정확한 내 수준을 파악하고 좀 더 확실히 내공을 쌓은 뒤 데뷔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는 현재 국내 여자 3쿠션 최강인 스롱 피아비(0.9점)를 넘는 날을 꿈꾸고 있다.

오씨는 “3쿠션은 여성들도 얼마든지 도전해 볼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오씨는 “3쿠션은 여성들도 얼마든지 도전해 볼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당구 전도사 된 스포츠 마니아

김용철 SBS스포츠ㆍ빌리어즈TV 당구 해설위원은 당구를 폄하하는 타 구기 종목 전문가들에게 “너희들은 공 한 개(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로 하지만 우리는 최소 3개를 컨트롤 한다”고 말한다. 우스개 소리지만 과거 당구를 스포츠로 보지 않는 시선에 대한 항변이었다. 오씨가 전문적으로 큐를 들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당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컸다. “당구장만 해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해졌고, 이제는 음지에서 양지로 당당하게 나온 스포츠라는 점에서 더 끌렸어요.”

동네 당구장에서도 나이 지긋한 노년까지 즐기는 모습이 흔한 당구는 선수로도 나이 제한이 없다. 40~50대까지도 전성기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유일한 스포츠다. 선수 데뷔를 결심한 오씨 역시 당구였기에 가능했다. 오씨는 당구 외에도 취미로 여러 스포츠를 섭렵할 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나 습득 속도가 남다르다. “당구장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직장은 골프장이기도 했고, 원래 ‘채’를 들고 하는 여러 운동을 좋아했어요.”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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