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굿즈 업체 ‘글입다 공방’
작가ㆍ작품서 연상되는 정취를
30㎖ ‘북퍼퓸’ 향수로 만들어
윤동주 ‘별 헤는 밤’ 판매 1위
“어린왕자는 풋풋함 느낌
김유정 봄봄은 산뜻한 향”
본보 기자들 시향 소감
님 가실 길에 뿌리운 영변 약산 진달래꽃에선 슬픔의 향이 날까. 아름다운 나타샤를 그리는 밤 푹푹 나리는 눈에 스민 건 애모의 내음일까.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다고 고개 떨구는 순간엔 절망의 냄새가 흩어질까.
그런 상상이 향수로 나왔다. 책에 뿌리는 향수, 혹은 책에서 영감 받은 향수라는 뜻의 ‘북퍼퓸’이다. 문학 굿즈 업체인 글입다 공방이 내놨다. 지난달 초 예약 판매를 시작한지 사흘 만에 초기 물량 1,200병이 매진됐고, 한 달 만에 1,200병이 더 팔렸다. 교과서 밖의 문학에 목마른 10대와 문화 콘텐츠 소비에 적극적인 2030세대가 주로 샀다. 문학은 외면 받는다지만 문학 굿즈는 잘 나가는 시대의 단면이다.
‘문학의 향기’라 부르는, 작가와 작품에서 연상되는 정취를 향으로 만들어 30㎖짜리 향수병에 담았다. 전문 조향 업체가 제작했다. 종이, 글자, 이미지, 향기가 하나 된 ‘공감각적 상품’인 셈이다. 윤동주, 백석, 정지용, 한용운, 이육사, 김소월, 이상, 김유정, 이효석 등 한국 대표 작가 시리즈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 ‘안나 카레니나’ ‘빨간머리 앤’ 같은 세계 명작 시리즈가 있다. 문학 작품은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고 저작권 문제가 걸리지 않는 것을 골랐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어왕’ 등이 선택되지 않은 이유다. 한국 고전은 대개 단선적 서사 중심이어서 향으로 바꾸지 못했다. ‘홍길동전’ ‘구운몽’ ‘흥부전’에서 향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작가 시리즈는 작가의 체취를 담은 게 아니라 작가의 대표 작품을 향으로 바꿨다. 김유정의 ‘봄봄’, 정지용의 ‘호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식이다. 그런데 작가 시리즈엔 여성 작가가 없다. 친일 전력 때문에 빠진 작가도 여럿이다. 한국 문학사의 비극이 북퍼퓸 제작 과정에도 담긴 것이다.
판매 1위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향수, 그 다음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향수라고 한다. 제일 안 팔리는 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 향수. 안동혁 글입다 공방 대표는 “한용운 시인이 승려여서 젊은 소비자들이 어려워하는 것 같다”면서 “‘모비딕’은 그럭저럭 팔라지만, 제목에 ‘노인’이 들어간 ‘노인과 바다’ 향수는 인기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예상과 달리 많이 판매되는 건 ‘셜록 홈즈’ 향수다. “추리소설 고전이 아닌,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의 팬들이 좋아한다”고 안 대표는 설명했다.
‘이방인’과 ‘데미안’의 향은 대체 뭘까. 별의 향은 맡을 수 없는데, ‘별 헤는 밤’은 향을 풍길까.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향수에선 정말 꽃향기가 날까. 2일 한국일보 기자들이 시향 해 봤다. 향수를 칙칙 뿌리자 마자 모비딕의 그 아득한 바다, 소금 뿌린 듯한 메밀꽃밭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향수 이름을 알고 향을 맡으니 어쩐지 그 작가, 그 작품이 떠올랐다”고들 했다 “‘어린 왕자’ 향수에선 미성숙함과 풋풋함을, 셜록 홈즈 향수에선 거만함과 세련됨을 느꼈다”(라제기 문화부장) 사고와 기억이 감각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향수 입자가 기자들의 시심을 자극한 걸까. 시를 닮은 평이 쏟아졌다. “정지용 ‘호수’의 향을 맡으니 충북 옥천의 작은 냇가에 와 있는 것 같다”(최흥수 기자), “백석 향기에서 눈송이가 무겁게 내려 앉는 그림을 보았다”(양진하 기자), “김유정의 ‘봄봄’ 향수는 막 세수했을 때의 산뜻한 향이다”(정은선 기자) 북퍼퓸 한 병은 1만 원대, 소설책 한 권 가격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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