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삭제
“남북 1991년 유엔 동시 가입”
“유엔 결의문에 ‘유일 합법’ 명시”
#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는 제한적 표현”
“정권 입맛 맞춰 ‘자유’ 삭제”
# 1948년의 의미
“임시정부 계승… 1948년엔 정부 수립”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이 맞는 표현”
2020학년도부터 중ㆍ고교 학생들이 쓸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이 2일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념공방에 다시 불이 붙었다. 중학교 역사 및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 시안을 마련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지난 1월 말 공개해 보수진영의 반발을 불렀던 쟁점 사안들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가 사용되고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표현이 사라질 가능성이 커지면서 오는 7월 집필기준이 최종 확정될 때까지 보수진영의 ‘색깔론 공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쟁점1. 삭제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진보ㆍ보수진영 간 의견 충돌이 가장 큰 지점은 이명박 정부에서 집필기준 마련 당시 논란이 컸던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표현의 삭제다. 지난 2009 개정 교육과정 상 집필기준에는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받은 사실에 유의한다’고 써 있지만, 2015 교육과정 새 시안에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들어선 정부의 수립 과정과 체제적 특징을 비교한다’는 정도로 기술돼 해당 표현이 빠진 것이다.
평가원은 역사교육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헌법학회 등 7개 관련 학회가 추천한 전문가 7명의 자문에 따라 “1948년 유엔 결의에 대한민국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돼 있는 것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라는 조건에서 유일하다고 결의한 것이지, 모든 조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평가원은 보고 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학계 중론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유엔 결의문에 한반도 이남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구절(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이 명확히 있고, 이와 관련된 논쟁은 학계에서 이미 끝난 사안”이라며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다 쳐도 적어도 그 이전까지는 불변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쟁점2. ‘자유’ 빠진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로 표현한 점 또한 보수 진영에서는 거세게 반발한다. 평가원은 전문가 7명 전원이 “민주주의는 역사 교육과정에서 계속 활용된 용어이고, 일반사회 교육과정에서도 적시된 용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제한적 표현은 역사적 의미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자유’를 뺀 ‘민주주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도 ‘자유민주’란 표현이 1970년대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했고 북한에 대한 체제 우위 선전 구호로 쓰였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욱 중립적인 서술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자유민주’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갖는 진보 역사학자들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반발하고 있다. 1987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의 전문가 제4조에 명시된 ‘자유’라는 단어를 빼는 건 현 정권의 입맛에만 맞춘 것이란 주장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가 2007년 집필기준을 도입할 때는 ‘민주주의’란 용어가 쓰였지만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때는 ‘자유민주주의’가 쓰이는 등 정부 성향에 따라 집필기준이 계속 바뀌고 있다. 김재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헌법적 가치를 교과서에 싣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쟁점3. 1948년의 역사적 의미
1948년의 역사적 의미와 관련한 서술은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일 당시 가장 쟁점이 됐던 부분이다. 당시 기존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유지되던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면서 진보진영의 큰 반발을 불렀는데, 이번 시안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다시 회귀했다. 진보진영에서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기 때문에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1948년에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은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이 밖에도 동북공정, 새마을운동, 북한의 도발 등을 이번에는 집필기준으로 따로 제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보수학계에서는 문제를 삼고 있다.
다만 평가원은 삭제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6ㆍ25 남침’ 표현에 대해서는 “전문가 7명 중 일부가 ‘남침’ 표현을 추가해야 이념적 논란을 차단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며 집필기준이 아닌 상위 교육과정에 넣기로 했다. 남부호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관은 “6ㆍ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에 집필기준보다 상위 기준인 교육과정에 넣었다”며 “집필기준에 쓰여있지 않다는 것이 교과서에 ‘남침 유도설’을 서술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집필기준이 공개될 때마다 소모적 갈등이 지속되는 걸 해소할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서울 중학교 역사교사는 “교과서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이 또다시 반복되고 그 중심에 교육현장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내부 교육과정심의회를 통해 이날 발표된 시안을 심의ㆍ자문한 뒤 최종안을 만들어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 이후 다시 심의회 의결을 거쳐 오는 7월쯤 새 교육과정ㆍ집필기준을 고시할 예정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국민 의견을 충분히 듣고 신중하게 최종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