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탄광 실태 담긴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
일본 대학생들 독서 감상문
“어떻게 이런 일이… 공포감 든다”
지난달 초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뜻밖의 선물을 하나 받았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의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고 이상업씨의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를 읽은 일본 대학생들의 감상문 94편이었다. 시민모임 측이 지난해 4월 이 책의 일본어판 500부를 일본 시민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에 보낸 게 감동의 답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시민단체 회원인 나야 마사히로(納屋昌宏ㆍ64) 아이치교대 독문학과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는 3개 과목 수강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 뒤 학생들이 써낸 소감을 시민모임에서 활동 중인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에게 이메일로 전달했다.
학생들이 500자 원고지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 감상문엔 그간 몰랐던 일제 강제징용 실태를 처음 접하고 느끼는 복잡한 심경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학생들은 성적 평가와는 무관한 것이어서 부담 없이 자신의 느낌들을 적었다. 이 학교 2학년 고니시 마유씨는 “조선인 징용제도에 대해 무지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잔혹한 당시 상황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일본 정부가 부인하고 있는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을 확인시켜주는 이 책은 일본 대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책의 저자는 15세이던 1943년 11월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미쓰비시광업 가미야마다(上山田) 탄광으로 끌려갔다.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지하 1,500m 막장에서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어린 동료 4명이 고통 속에 숨져가는 모습을 목격한 고인은 수기에서 탄광을 “지옥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는 세 번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탄광을 빠져 나온 뒤 사지나 다름없던 곳에서의 참상을 글로 남겼다.
고다마 유다이(4학년)씨는 “책을 읽고 전쟁의 공포를 느꼈다”며 “이런 일을 일본인이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공포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슬퍼진다”고 적었다. 2학년 다케우치 미쿠씨도 “지금 일본과 한국의 관계와는 너무 달라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며 “일본은 당시 조선인에게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강요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강제 징용에 대한 참상을 뒤늦게 알게 된 데 대한 원인을 일본의 역사교육 문제에서 찾는 학생도 있었다. 가야하라 유이(4학년)씨는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역사교육에서는 일본은 피해자였고, 전쟁의 비극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일본도 소름 끼치는 가해자가 아니냐”며 “자국이 저지른 일을 감추고 후세에게 전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허탈한 심정을 밝혔다. 고니시 마유(2학년)씨는 “일본 역사교육의 중점은 패전국 입장을 강조하며 세계 유일의 피폭 국임을 강조하는데 있다”며 “초등학교에서부터 일본의 과오를 배우고 다른 민족을 존중하는 마음을 기르는 부분이 현재의 일본 교육에서는 빠져 있다”고 쓴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이국언 시민모임 대표는 “일제 강제징용이 교과서에서 다뤄지지 않아서 그런지 일본 대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일본이 가해국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며 “최근 마사히로 교수가 역사 왜곡에 대한 반박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이 책을 200부 더 보내달라는 요구가 있어 일본어판을 추가 발행해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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