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출신 영국 유학생 와히두르 라흐만은 지난해 영국 내무부로부터 갑작스럽게 체류 비자를 취소당했다. 영어능력시험 토익(TOEIC)을 출제하는 미국 교육시험서비스(ETS)에서 그가 대리를 내세워 시험을 친 것으로 판정했다는 이유였다. 라흐만은 대학 강의도 들을 수 없게 됐고 아르바이트 자리에서도 쫓겨난 채 영국에 있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법정 다툼을 벌였다.
영국 내무부는 라흐만이 일단 방글라데시로 귀국한 후 법정 다툼을 벌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항소법원은 지난해 12월 그가 해외에서 사법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를 인터뷰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라흐만의 영어 실력이 매우 유창해 시험에 굳이 대리를 쓸 이유가 없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라흐만은 “이런 터무니없는 혐의를 벗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라며 “영국 정부는 최소한 내게 확인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를 추방하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FT는 1일(현지시간) 영국 내무부가 자국 내 ‘토익 사기’를 잡으려다 라흐만처럼 무고한 유학생 최소 7,000여명의 비자를 강제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는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내무장관 시절인 2014년부터 영국 내무부가 토익 말하기 시험에 대리를 세운 혐의가 드러나면 비자를 취소하는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에 생겼다. 내무부는 ETS가 시험 대리를 적발하면 명단을 전달받아 비자를 취소하는 방식으로 2016년까지 총 3만5,870명의 비자를 취소했다.
문제는 대리 적발에서 강제 추방까지의 과정이 일방적이고 해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ETS의 대리 적발 프로그램을 사후 점검한 결과, 프로그램이 대리로 판정한 사례의 5분의1이 실제로는 대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는 정당하게 시험을 치른 녹음 파일이 가짜 녹음 파일로 뒤바뀌는 사례까지 나올 정도로 검증 절차가 부실하고 법률적 근거가 부족했다.
영국 내무부는 최근 이민자 문제와 관련한 잡음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1960년대 카리브해 영연방 지역에서 이민해 온 ‘윈드러시 세대’를 불법 이민자로 분류해 추방 명령을 내린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급기야 앰버 러드 내무장관이 자진 사퇴했다. 메이 총리는 파키스탄 이민가정 출신 사지드 자비드를 새 내무장관에 임명하며 이민자들을 위하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영국 언론들은 소위 ‘적대적 환경’이라 불리는 내무부의 엄격한 이민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이민 관련 스캔들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적대적 환경 정책이란 불법 이민자의 영국 내 삶을 어렵게 하겠다는 취지로 이민자에 대한 감시의 강도를 늘린 정책이다. 가디언은 내무부가 불법 이민 억제 실적을 만들기 위해 정당한 이민자마저 불법 이민자로 몰아 비자를 취소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잇따른 스캔들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영국이 이 정책을 버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 정책이 메이 총리의 장관 시절 작품인데다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촉발한 반이민 정서도 여전히 강력하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4월24~25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1%가 적대적 환경 정책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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