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미국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앨커트래즈는 내전기(1861~65) 북군의 캘리포니아 방어 기지였다.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마주 보며 샌프란시스코만 복판에 선 섬은 골든게이트 해협을 빠져나온 빠른 해류를 방패 삼은 천혜의 진지였다. 동시에 효과적인 수감시설이기도 했다. 주둔군은 초기부터 기지 지하에 감옥을 설치, 남부의 첩자나 반역자들과 선주민(인디언)을 감금했고, 63년 별도의 수감동을 짓기도 했다. 1933년 군이 철수하고 연방교정국 시설로 이관될 무렵 앨커트래즈에는 죄수 32명이 수감돼 있었다. 교정국은 시설개조에 큰 힘 들이지 않고 곧장 섬을 최악의 범죄자 감옥으로 활용했고, 이듬해 1차 죄수 137명을 수감했다. 대부분 마피아 등 조직범죄자와 흉악범, 탈옥 전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탈옥 불가’라는 앨커트래즈의 명성은 그렇게 처음부터 자자했지만, 그 명성을 증폭한 것은 역설적으로 일련의 탈옥 시도였다. 1963년 감옥이 문을 닫을 때까지 29년간 총 14차례 탈옥 시도가 있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62년 프랭크 모리스와 앵글린 형제(존과 클래런스)의 탈옥과 46년 ‘앨커트래즈 전투’다. 두 사건 모두 여러 편의 영화로 제작됐고, 숟가락으로 감방 땅굴 파기와 인형으로 위장하기 등 그들의 탈옥 수법은 영화ㆍ소설에 차용되거나 영감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앨커트래즈 신화를 강화했다.
최초 시도인 ‘앨커트래즈 전투’는 37년 은행강도로 25년 형을 살던 버나드 코이(Bernard Coy)의 주도로 1946년 5월 2일 시작됐다. 수감동 잡역부였던 그는 살인범 장기수 조 크레처(Joe Cretzer) 등 동조자를 규합, 감옥 일부를 장악했다. 앞서 그는 몇 달간 살을 뺀 뒤 창살을 휘어 뚫고 무기고를 털었다. 간수들을 인질 삼아 뭍과 섬을 오가는 정기 보트를 탈취, 본토로 잠입한다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사동에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열쇠를 엉뚱한 간수가 지니는 불운 탓에 그들의 탈옥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지만 그들에겐 총이 있었다. 출동한 해군과 해안경비대와의 만 이틀 대치와 교전 끝에 코이 등 주범 3명은 피살되고, 2명은 2년 뒤 사형당했다. 간수 등 2명이 숨졌고 11명이 부상당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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