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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승부사’ 조치훈 9단 바둑입단 50년 “아직도 패배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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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승부사’ 조치훈 9단 바둑입단 50년 “아직도 패배는 억울하다”

입력
2018.05.0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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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하루 5~6시간씩 공부

최근에는 AI 연구에 큰 관심

“박정환 9단이 AI와 비슷”

“한국의 종합기전 축소는 문제

기사들이 기량 펼칠 기회 줄어”

조치훈(왼쪽)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조혜연(33) 9단과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을 벌이고 있다.
조치훈(왼쪽)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조혜연(33) 9단과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을 벌이고 있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수 없이 졌고, 새로운 패배는 항상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지독해 보였다. 적어도 치열함에 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그의 50년 반상(盤上) 철학 역시 아직까진 유효한 듯 했다. 세계 바둑계 전설로 불리는 조치훈(62) 9단의 첫인상은 그만큼 강렬했다.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에서 조혜연(33) 9단에게 승리한 직후, 만난 조 9단은 패배했을 때의 겪어봤던 쓰라림으로 우승 소감을 대신했다. 냉혹한 반상의 세계에서 그가 수 많은 우승과 함께 ‘불멸의 승부사’란 별명을 얻게 된 이유로도 풀이됐다.

지난 1968년 일본기원 사상 최연소인 11세9개월에 입단한 조 9단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지론도 내비쳤다. “아직도 하루에 5~6시간씩 바둑 공부에 매달리고 있어요. 프로기사라면 그 정도의 시간 투자는 당연한 게 아닌가요?” 조 9단은 아직도 식지 않은 바둑에 대한 집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대국 직전 당한 교통사고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은 조치훈(오른쪽) 9단이 지난 1986년 1월 일본내 최대기전인 기성전 타이틀 결정전에서 왼손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대국 직전 당한 교통사고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은 조치훈(오른쪽) 9단이 지난 1986년 1월 일본내 최대기전인 기성전 타이틀 결정전에서 왼손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사실, 조 9단의 열정은 바둑계에선 이미 ‘비교 불가’로 통한다. 지난 1986년 1월 일본내 최대기전인 기성전 타이틀전을 10여일 앞둔 시점에서 두 다리와 왼손 골절, 머리 찰과상 등의 전치 25주의 중상을 입었지만 왼손에 깁스를 한 상태에서 강행한 휠체어 대국은 지금까지 전대미문의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조 9단은 “바둑을 둘 수 있는 오른손과 머리만 멀쩡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바둑을 두라는 뜻”이라며 담당의사의 만류에도 라이벌이었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대국을 벌였다. 비록, 상대에겐 패했지만 이 휠체어 대국은 조 9단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아 있다.

조치훈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조치훈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가장 눈 여겨 보는 후배는 한국 박정환 9단…인공지능(AI)과 가장 가까운 대국 펼쳐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조 9단은 여전히 현역 프로기사로 맹활약 중이다. 조 9단은 현재 체류 중인 일본 내에서도 1주일에 최소 1대국 이상의 공식 기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만큼, 조 9단의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 9단은 최근 가장 큰 관심사에선 자신의 성적 보단 인공지능(AI)을 꼽았다. “AI인 알파고 등장 이후에 바둑계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어요. AI가 따라갈 수 없는 바둑을 보여줬거든요.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바둑에 관한 한, 전설적인 기사로 평가 받아 온 조 9단이었기에 AI 존재감을 쉽게 인정하긴 힘든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걸어온 발자취 속엔 믿기 힘든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우선 이번 대주배 결승에서 승리를 가져가면서 그의 공식기전 우승 횟수는 75회로 늘었다. 이는 일본 프로바둑 기사의 최다 우승 기록으로, 2위인 고 사카다 에이오 9단의 64회와 비해서도 월등히 앞서 있다. 그는 특히 일본내 3대 기전인 기성과 명인, 본인방 등을 동시에 석권한 ‘대삼관’ 기록을 무려 4차례나 작성했다. 또한 일본내 주요 7대 기전을 1차례 이상씩 우승하면서 완성한 ‘그랜드슬램’(1987년)과 본인방전 10연패(1989~98년) 또한 조 9단만의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지난해엔 일본내 프로바둑기사로선 최초로 1,500승을 거둔 그는 앞서 세계대회에서도 ‘제4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1991년)와 ‘제8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2003년) 우승컵을 가져갔다.

이처럼 ‘기록 제조기’로 이름난 조 9단에게도 눈 여겨 보는 후배 기사는 있다고 했다. “한국의 박정환 9단이 AI와 제일 가까운 바둑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박 9단 이전 선수들의 대국을 보면 이해하겠는데, 박 9단이나 AI가 둔 바둑을 복기하다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 수들이 많습니다. 바둑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선 건 분명해 보입니다.”

조치훈(왼쪽)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조혜연(33) 9단과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에서 승리한 직후, 복기를 하고 있다.
조치훈(왼쪽) 9단이 지난 달 23일 경기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조혜연(33) 9단과 ‘제5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 대국에서 승리한 직후, 복기를 하고 있다.

일본 바둑의 부진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 고수한 탓…한국도 공식기전 많아져야

조 9단은 세계 바둑의 중심인 한ㆍ중ㆍ일, 3국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공공연한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일본 바둑이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엔 아직도 이틀씩 두는 기전이 있어요. 점점 제한시간이 빨라지는 국제대회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죠. 오래된 전통만을 너무 고집하다 보니, 요즘 추세인 속기전을 등한시합니다. 일본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고전하는 건, 당연할 수 밖에요.” 조 9단은 장고 대국에 익숙한 일본 프로바둑 기사들의 국제대회 속기전 부진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했다. 실제, 현재 일본 바둑계 절대강자인 이야마 유타(29) 9단은 자국내에선 7개의 주요 기전 우승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지만 세계 대회 우승은 지난 2013년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가 유일하다. 일본 바둑이 한국과 중국에 한 단계 아래로 지목 받고 있는 이유다.

한국 바둑에 대한 쓴소리 또한 이어졌다. “한국엔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가열차게 바둑을 두는 선수들이 자주 보이거든요. 그런데, 프로바둑 기사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종합기전이 줄어 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바둑대회 유치를 위해서 정부와 각 기업에서 경쟁 중인 중국과는 확실하게 다릅니다. 뛰어난 실력의 프로바둑 기사들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는 배경이죠.” 현 상태에선 한국 바둑의 미래를 장담할 순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바둑계에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넨 조 9단은 자신에게 남겨진 바둑 인생에 대해선 더 깐깐한 잣대를 들이댔다. “제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 좌절 등이 모두 바둑에 있어요. 바둑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적인 마음이 없어지면 그 땐 미련 없이 떠날 겁니다. 그래도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바둑을 둘 때까진 바둑판 옆에 있어야죠.” 50년을 달려온 조 9단의 반상 행마에선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글ㆍ사진=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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