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를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우리끼리 존엄하다고 우기는 것도 우스울뿐더러, 내가 남에게 베이지 않으려면 나도 남을 베지 않아야 하니 이런 얄팍한 평화협정들이 모여 마치 서로를 존중하는 양 ‘인간은 존엄하다’고 머쓱하게 선언해온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실제 존엄은 고사하고 환멸의 바닥을 경험하게 하는 군상들은 많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들을 찾아가 폭식투쟁을 벌이며 히히덕거리던 젊고 천진난만해서 더 악마 같던 그 낯짝들, 이런 저런 수사ㆍ판결을 힘있는 사람들을 위해 왜곡하면서도 마치 엄청나게 논리적인 것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게 설명하던 검사ㆍ판사들, 장애인 학교는 자기 집 근처에 지어서는 안 된다며 거품을 무는 주민들, 그리고 피해자와 약자에게 끊임없이 달리는 능욕과 조롱의 댓글들….
우리는 스스로를 개ㆍ돼지 보다 못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우리와 함께 인간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이들 군상들을 보며 자해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요즘은 병리학적 탐구 대상으로까지 보이는 한진그룹 일가의 갑질 사례들이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갑질과 혐오가 난무하는 이유는 종합적이겠지만, 계층의 비가역성이 강화됐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양호 일가는 후손이 자신들이 물건을 던지고 폭언했던 월급쟁이의 입장이 될 수 있다고, 고급 아파트에 살며 택배기사에게 갑질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도 택배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조차 안 해 봤을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능은 꼬리뼈처럼 퇴화했고, 뇌는 ‘자신에 대한 객관화’라는 피곤하지만 인간이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을 중단한지 오래 된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것처럼 보일 때 떠오르는 우울하고 근본적인 질문 하나. 이들의 비율은 몇 %나 되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를 해칠 수 있나.
한국 성인 중 25%는 갑질(폭군적 리더십, 물리적 폭력, 정서 학대, 직장 내 왕따 등)을 해봤고, 직장인 32%는 특혜채용(채용비리)을 용인하는 의미로 ‘채용은 기업소관’이라고 답했다. 거대한 범죄혐의가 드러난 후에도 국민 약 20%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했고, 27%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을 반대했다. 각종 설문 조사를 보면 최소 5명 중 1명은 보통의 상식ㆍ도덕ㆍ정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더구나 권력자가 지시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전기고문을 가한다는 실험결과(1961년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는 유명하다. 체벌을 통한 학습효과를 보겠다고 속인 실험에서, 학생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 속에 애원하는데도 연구자가 지속하도록 독촉하자 참여자 중 65%가 최고치인 450V(사망가능)까지 전기충격을 높였다. 물론 학생은 연기자였고, 전기 장치는 가짜였다.
이 실험은 권력자가 누구냐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이 악에 가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충격적인 연구로 기록돼 있다. 우리도 겪었다. 국정농단 가담자였던 안종범 조원동 전 청와대 수석은 법정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라고 말했고, ‘땅콩회항’의 피해자였던 박창진 사무장은 대한항공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감시를 당했다고 토로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결코 뒤돌아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남북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국가와 인류에 대한 은유도 느껴진다. 인간 대다수가 악에 가담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나. 그게 가능한 건 최종 버튼 누르기를 거부했던 35%가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일깨우고 싸워 나가기에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위로해야 할 것 같다. 역설적으로 다수가 아니라서, 용기 있고(비겁하지 않고) 따뜻하고 책임을 다하는 동료나 지도자의 존재는 사랑보다 애틋할 때가 있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그 이유일 것이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