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돌이킬 수 없는 중대 조치’ 하면
북미 수교, 제재 해제 등 단계별 보상
北 정권 협조와 빠른 비핵화 속도
‘동시-일괄적 이행 조치’에 무게
북한과 핵 기술ㆍ시설 수준 격차 커
리비아 모델 적용 가능성에 회의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03년 리비아에 적용했던 ‘핵 폐기 모델’을 적극 변용,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북미수교 혹은 제재해제 등 보상조치를 ‘완전 폐기’ 대신 그 이전에 ‘돌이킬 수 없는 중대조치’ 가 발생하면 개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분석됐다. 북한과 중국이 주장하는 ‘행동 대 행동’ 방식은 아니어도, 협상 타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북한이 비핵화 조치에 속도를 내고 적극 협력해 ‘비핵화 프로그램’이 미국이 원하는 지점을 통과하면 단계별 보상에 돌입하겠다는 것이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9일(현지시간) 미국 CBS방송과 폭스뉴스에 출연해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2003~2004년 리비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리비아 모델’은 ‘선 폐기-후 보상’ 방식이 아니다. 당시 리비아 정부의 적극 협조 아래 아주 빠른 시간에 핵 폐기작업이 종료됐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정 시점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단계별 보상 조치로 호응했다. 따라서 볼턴 보좌관의 ‘리비아 모델’ 언급은 북한의 ‘행동 대 행동’ 원칙과 ‘완전 핵폐기 후 보상’이라는 미국의 기존 강경 입장을 절충한 제3의 비핵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볼턴 보좌관이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 시절 주도적으로 진행한 리비아 핵 폐기 작업은 ‘선 폐기-후 보상’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은 2003년 리비아가 영국을 통해 핵과 대량살상무기 폐기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 비밀 회담에 응해 “표면상 행동 대 행동” 방식을 제의했다. 리비아가 구체적 행동을 보일 때마다 미국이 제재를 일정 부분 해제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2003년 내내 압박을 그치지 않았지만, 9월 유엔이 대 리비아 제재를 해제할 때는 기권을 선택해 용인했다. 그 해 12월 비핵화 및 화학무기 해체 선언과 함께 리비아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ㆍ영국 전문가에 자국이 보유한 핵 기술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2004년 1월 고농축 우라늄의 전단계로 평가되는 육불화우라늄과 원심분리기 2대 및 부품 등을 인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이 조치를 핵개발 계획의 5%에 불과한 ‘빙산의 일각’이라고 폄하했지만 리비아 여행금지령 해제로 화답했다. 3월에는 윌리엄 번스 당시 국무부 중동담당 차관보가 리비아를 방문해 “외교관계 단계적 회복”을 선언했다. 9월 폴라 디서터 당시 국무부 검증담당 차관보는 리비아의 군축 작업에 대한 검증이 근본적으로 완료됐다고 선언했고, 미국은 리비아를 향한 대부분의 제재를 해제했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볼턴 보좌관이 리비아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구체적 절차’보다는 당시 진행된 빠른 비핵화 속도와 리비아 정권의 적극 협조를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도 “볼턴의 의도는 실제 이행하는 과정은 리비아와는 다르게 동시ㆍ일괄적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고 싶다면 당시 리비아 지도자(무아마르 카다피)를 능가하는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주문인 셈이다.
하지만 리비아 모델이 북한과의 협상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북한의 핵무기 개발 수준이 2003년 당시 리비아와는 다른 만큼 북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서 검증과 폐기 절차도 쉬웠던 리비아와 달리, 북한은 사실상 핵 개발 완성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국무부 군축차관을 담당한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리비아는 원심분리기만 들고 오면 됐지만, 북한은 핵무기가 있고 핵 생산 시설도 보유하고 있다”며 “검증ㆍ해체 작업에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리비아 모델을 기피해 온 북한의 입장도 변수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의 대가로 기대하는 체제 보장 요구를 미국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다피 정권은 2011년 ‘아랍의 봄’이 번질 때 반정부 시위를 억압했지만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개입으로 결국 반군에 붙잡혀 처형됐다. 안토니 블링큰 전 미 국무부 부장관은 뉴욕타임스에 “중국으로부터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들었다”라며 “리비아를 언급하는 것이 그나마 있는 회담의 가능성을 흔드는 게 아닌가 우려한다”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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