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법치주의 위기’ 논란을 빚고 있는 일부 회원국에 대해 EU 예산 지원을 중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등 EU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는 회원국에 EU의 자금이 쓰이도록 할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해당 국가들의 돈줄을 차단해 행동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압박이다. 최근 사법부 독립 침해, 반(反)난민 정책 등으로 EU와의 갈등이 심화하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2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EU 구조기금 규제안을 공개할 방침이다. EU의 한 소식통은 “정확한 세부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문제를 야기하는) 회원국이 행동 변화에 나서도록 동기 부여 차원에서 일시적 자금 지원 중단이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귄터 외팅거 EU 예산국장도 FT에 “EU 기금은 사법부가 독립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나라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EU 구조기금이란 회원국들 간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에 지원되는 개발 지원 자금이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한 해 각각 55억유로(7조 1,221억원)와 27억유로(3조 4,963억원)를 EU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폴란드는 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사법개혁안과 관련, EU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심각히 침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고, 헝가리 역시 폴란드와 함께 EU의 난민 강제할당제에 격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태다. EU 집행위가 2021~2027년 장기예산계획을 수립하면서 마련한 ‘새 기금 운용 기준’이 사실상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경제 제재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EU 집행위는 지난해 12월 ‘회원국 중 3분의 2가 EU의 근본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결정한 국가에는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정한 리스본 조약 7조를 발동, 폴란드의 법치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헝가리가 폴란드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어 실효성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EU 집행위는 이번에 자금 지원 동결과 관련한 조항을 개정한 새 법안까지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사국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콘라트 시만스키 폴란드 유럽의회 의원은 “EU 집행위가 폴란드 처벌에 이용될 새로운 재량권을 창출했는데, 이는 법치를 지킨다면서 법치를 짓밟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EU 내에서조차 가치(사법제도)와 돈(기금 지원)을 직접적으로 묶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내부 비판도 나온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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