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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맛없는 딸기를 사는 법

입력
2018.04.29 17:5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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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버스를 잘못 탔다. 버스는 멀리 돌고 돌았으나 다행히도 우리 동네 근처까지 나를 실어다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한 블록 정도 걸으면 집 앞까지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방향을 선회하는 지점이라 승객들로 북적이는 저녁 시간에도 앉아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봄밤이었다. 그러니까 미세먼지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목적 없이 걷기에 딱 좋은 온도, 습도, 냄새, 소리를 갖춘 상황이었다. 늦은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거리에는 미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달리는 자동차 바퀴와 아스팔트 도로의 마찰음은 영화 속 배경음처럼 몽환적으로 울렸고, 잿빛 보도블록에는 벚꽃 잎들이 생선비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얼마쯤 걷다보니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 있는 상점 앞이었다.

대형 할인마트 보다는 작고 웬만한 편의점보다는 규모가 큰, 흔히 슈퍼마켓이라고 부르는 상점이었다. 개업 기념 할인판매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내 눈에 띈 것은 ‘딸기 한 팩에 천오백 원’이라는 글귀였다. 천오백원이라니! 저렇게 윤기 흐르는 선홍색 딸기가! 딸기는 나무나 풀에서 열리는 열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육천 원을 내고 딸기 네 팩을 챙겼다. 마을버스는 예상대로 텅 비어 있어서 편안하게 집까지 갈 수 있었다.

아침에 딸기를 냉장고에서 꺼낼 때까지는 흐뭇했다. 그런데 딸기를 씻고 있자니 뭔가 미심쩍었다. 딸기 향이 나지 않았다. 하나 집어 먹어 보았는데 아무 맛도 없었다. 두 번째 딸기도 마찬가지였다. 향도 없고 맛도 없었다. 예전에 밭에 딸기 몇 포기를 심고 키워봐서 아는데, 딸기는 따자마자가 가장 맛있다. 눈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맛과 향이 급격하게 사라진다. 맛없는 딸기를 눈앞에 두고 나는 하릴없이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딸기는 흰색 꽃의 가운데 부분인 꽃턱이 부풀어 올라 열매가 된다. 처음에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는지. 알고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맛있거나 맛없는 딸기들은 모두 그렇게 신기하고도 놀라운 존재들이다. 가장 맛있는 순간에 따 먹으려고 아껴둔, 잘 익은 딸기는 다람쥐가 와서 먼저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람쥐는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매우 소중한 것을 다루듯 두 앞발로 딸기를 살짝 들고 먹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차마 먹고 있던 딸기를 버리고 갈 수 없어 잠시 머뭇거리곤 했다.

세상에 맛있는 딸기와 맛없는 딸기가 섞여 있다면, 늘 맛있는 딸기만 나에게 올 수 없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맛있는 딸기를 먹고 싶어 한다. 먹고 싶어 하는 것과 먹어야 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내가 늘 맛있는 딸기만 먹으면 다른 누군가는 늘 맛없는 딸기만 먹게 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늘 맛있는 딸기만 먹어야 한다는 마음은, 나는 늘 맛없는 딸기만 먹어도 괜찮다는 마음만큼이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행복은 많은 경우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불행한 사람들이 다수인 세상에서 나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맛없는 딸기만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맛있는 딸기만 먹는 사람들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맛없는 딸기와 맛있는 딸기를 행복하게 나누는 법이 있을까. 물론 맛없는 딸기가 나에게 온 것은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이 아니다. 버스를 잘못 탔고, 봄바람에 마음이 설렜고, 환한 조명이 딸기의 미모를 돋보이게 한 우연들이 겹쳐서이다. 나는 그렇게 우기고 싶다. 우연은 행복을 적절히 나누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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