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직후에는 긍정적이던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에 대한 인식이 후기로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8일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고려 건국과 경기 설립의 역사적 의의’ 학술회의에서 이규철 한국외국어대 강사는 ‘조선시대 공민왕 인식 변화 과정’이라는 제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고려 제31대 임금인 공민왕은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를 이용해 친원파를 몰아내는 등 많은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북진정책을 실시해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대내적으로는 관제를 개혁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비롯해 신흥유신들은 공민왕의 개혁시기 중앙정치에 진출한 이들이 많았다.
이 강사는 “조선 건국세력은 공민왕의 통치방식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국가운영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특히 조선은 초기에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 창왕, 공양왕을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민왕을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군주로 상정하고 높게 평가했다”고 말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고려 태조와 공민왕을 국가 제사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공민왕에 대한 인식은 세종과 세조 대를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이 강사는 지적했다. 두 임금이 군사적으로 성공하면서 외적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공민왕의 부정적인 면이 부각됐다는 것이다. 이 강사는 “성종과 중종 대에는 공민왕을 망국 군주로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 평가가 대세를 이루게 됐다”며 “현종 대에는 ‘혼주’(어리석은 군주)로 일컬어진 광해군과 비교될 정도로 평가가 나빠졌다”고 주장했다. 업적과 한계가 모두 언급된 조선 초기와 달리 후기가 되면서 공민왕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주관하고 인천문화재단과 경기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했다. 강화 천도의 외교적 배경, 근현대 개성인에게 끼친 고려 영향, 해방 직후 고려 국호론의 전개와 고려 표상 등 9건의 발표가 이뤄졌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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