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택시잡기 너무 어렵다"
친구 불만 들은 후 택시앱 개발
택시회사 일일이 찾아가 영업
현지인 90%가 현금 쓰는 데 착안
우버 앞서 현금결제 시스템 구축
베트남ㆍ태국선 오토바이공유 선봬
우버, 동남아 사업 그랩에 매각
현대차ㆍ삼성전자 등 투자 주목
작년 핀테크 금융부문 사업 확장도
/그림 12012년 30살의 나이에 "말레이시아의 복잡한 택시 시스템을 해결하겠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그랩(Grab)을 설립한 앤서니 탄은 설립 6년 만에 세계 1위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인 우버(Uber)를 누르고 동남아 1위 업체의 CEO로 거듭났다. 블룸버그
최근 세계 1위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인 미국 우버(Uber)가 동남아시아에서 현지 벤처기업에 무릎을 꿇었다. 우버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동남아 지역 사업을 경쟁사인 그랩(Grab)에 매각하고, 그랩 지분 27.5%를 확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에서 생소하지만 그랩은 동남아 차량공유 서비스 시장의 75%를 점유한 회사로, ‘동남아시아판 우버’라 불린다. 1월 현대차가 그랩에 대한 수백억원대 투자를 결정했고, 뒤이어 삼성전자도 그랩과 전략적 제휴(MOU)를 체결했다. SK그룹 지주사인 ㈜SK도 이달 초 그랩이 진행한 20억 달러(약 2조1,200억원) 규모의 투자유치에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국내 4대 그룹 중 3곳이 그랩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30살의 한 말레이시아 청년이 “복잡한 택시 시스템을 해결하겠다”며 창업한 그랩은 철저한 현지화 전략 아래 콜택시, 차량공유 등의 분야로 확장을 거듭하며 설립 6년 만에 ‘원조’ 우버를 누르고 동남아 1위 업체로 도약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8개국에 진출해 가입 운전자 240만명을 확보했다.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ㆍ앱) 다운로드 누적건수는 8,100만 건, 일평균 운행건수는 350만건에 달한다. 초기 자본금 2만5,000 달러로 출발한 그랩은 현재 시장에서 6조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평가된다. 이 같은 그랩의 ‘광폭 성공’ 스토리는 이 회사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앤서니 탄(Anthony Tanㆍ36)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친구의 ‘말레이시아 택시’ 불평 듣고 창업 시작
탄은 말레이시아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택시 기사였고, 할아버지는 1950년대 일본 닛산(Nissan) 자동차를 수입해 말레이시아에 판매하는 탄청모터스(TanChong Motors)를 설립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업을 물려 받았다. 3대가 자동차 내력을 지닌 집안에서 자란 셈이다. 탄의 ‘미래’도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업을 물려받아 사업을 확장하는 것.
하지만 우연한 계기가 삶의 방향을 바꿨다. 2011년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동기생이 그를 만나기 위해 말레이시아를 찾았다. 친구는 말레이시아 택시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택시는 잡기 어렵고, 기사는 외국인에게 ‘바가지’ 요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친구는 택시 사업을 제안했다. 탄 역시 말레이시아에서 택시를 잡기 어렵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각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해 ‘마이택시’(MyTeksi)란 콜택시 앱을 개발해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사업경연대회에서 2위로 입상했다. 콜택시 앱 ‘그랩택시’의 시작이었다.
그는 2012년 6월 탄청모터스를 그만두고 쿠알라룸푸르에서 그랩택시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기 자본금은 2만5,000달러였다.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대형 택시회사를 일일이 찾아 다니며 영업을 시도했으나 문전박대만 당했다. 일단 콜택시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또 택시기사들은 인터넷이나 위성항법장치(GPS)를 이용해 본 적이 없고, 스마트폰을 살 여력도 없었다. 이들은 승객을 태우지 못한 채 거리를 빙빙 도는 경우가 많았지만, 새로운 서비스에 거부감을 느꼈다. 당시 탄은 택시가 몰리는 공항과 쇼핑몰, 주유소 등을 직접 돌며 “승객과 수입을 모두 늘릴 수 있다”고 기사들을 설득했다.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서비스 초기 약 30명에 불과했던 택시기사 가입자 수는 2014년 2만5,000명까지 불어났다. 이후 2015년 말 16만명, 2016년 3월 20만명까지 늘었다. 2013년 3월 필리핀 진출을 시작으로 싱가포르ㆍ태국(2013년 10월), 베트남(2014년 2월), 인도네시아(2014년 6월) 등으로 범위를 넓혔다. 지난해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도 사업을 개시하며 그랩택시의 ‘영토’는 동남아 8개국 190여개 도시로 확대됐다. 서비스 범위도 택시호출뿐 아니라, 개인차량을 중개하는 그랩카(GrabCar), 출퇴근길 동승자를 구해주는 카풀서비스 그랩히치(GrabHitch), 오토바이를 공유하는 그랩바이크(Grabike) 등으로 확대됐다. 이에 따라 회사 이름도 그랩택시에서 ‘그랩’으로 통합했다.
철저한 ‘현지 맞춤형’ 서비스로 시장 장악
그랩이 단기간 성장한 배경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꼽힌다. 현금 결제가 대표적이다. 우버는 동남아에서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신용카드를 등록해서 결제하도록 했다. 반면 그랩은 신용카드와 함께 현금으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남아 현지인 10명 중 9명이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나중에 우버 또한 현금결제 기능을 추가했으나 이미 시장의 주도권은 그랩에 넘어간 뒤였다. 오토바이를 주로 활용하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 오토바이 공유서비스(그랩바이크)를 내놓은 것도 맞춤형 전략의 일환이다.
저렴한 수수료도 비결이다. 구체적인 수익구조가 공개되지 않으나 그랩이 택시기사로부터 받는 수수료는 싱가포르에서 1건당 0.2달러(약 220원), 태국은 0.7달러(약 760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그랩은 승객으로부터 받은 수수료 중 일부를 보조금으로 돌려주고 있다. 또 그랩은 자사 기사로 일주일에 48시간 일하면 한 달에 약 400달러를 벌 수 있다고 현지에서 홍보했다. 이는 현지 금융업 종사자 초봉과 비슷한 수준이다.
운도 따랐다. 6억명 인구를 보유한 동남아는 세계적으로도 ‘거대’ 시장이다. 하지만 우버 등은 동남아보다 인구가 더 많고 단일 국가로서 시장가치도 높은 중국이나 인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면 1순위는 중국 혹은 인도였다. 동남아가 상대적으로 후순위였다는 얘기다. 우버가 중국 시장에서 현지기업 디디추싱((滴滴出行ㆍ중국 내 차량공유 서비스 1위)과 혈투를 벌이는 사이 그랩은 동남아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할 수 있었다.
그랩은 핵심 기반인 승차공유를 넘어 금융부문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랩은 지난해 11월 모바일결제 플랫폼인 ‘그랩페이’를 동남아에 출시하며 핀테크 시장 개척에 나섰다. 온ㆍ오프라인 일반 매장에서 현금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모바일 결제 서비스다. 탄은 최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남아 6억2,000만명의 인구가 무현금 결제 방식을 활용해 디지털 경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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