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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새야 새야 파랑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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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새야 새야 파랑새야

입력
2018.04.26 16:3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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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서 충북 보은군은 꽤 중요한 곳이다. 경상ㆍ충청ㆍ강원지방을 돌며 동학의 기틀을 잡은 2대 교주 최시형이 1885년 보은 외곽의 장내리로 이주해 동학의 본거지로 삼았다. 1893년 전국 동학교도 약 2만명이 ‘척왜양(斥倭洋)’을 외치며 그곳에 집결한 ‘보은집회’는 동학이 구한말 민족민중운동의 구심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인지 보은엔 동학도가 적지 않았다. 평생 대처승 머리를 하셨던 외조부님도 내가 그곳에서 자랄 때 가끔 ‘동학란’ 얘기를 해 주곤 하셨는데, 동학도였던 거다.

▦ 할머니는 잠자리에서 나른한 봄날 같은 노래를 불러 주곤 하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하는 끊어질 듯 말 듯한 노래였다. 그 노래가 흐르면 뜬금없이 어느 산자락 무우밭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꼬부랑길을 떠올리며 잠이 들곤 했다. 그때가 1960년대 후반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괴멸된 후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된 게 1895년 4월 24일이니, 무려 70여년이 지나도록 보은엔 비운의 노래가 여전히 감돌고 있었던 셈이다.

▦ ‘녹두꽃’의 주인공 전봉준을 다시 만난 건 그 시절로부터 다시 10년이 한참 지난 1980년대 초다. 대학 교정에는 늘 최루가스가 뿌옇게 감돌았고, 머리 으깨지고 다리 꺾인 참혹한 시신의 모습이 즐비한 광주사진첩이 불온문서처럼 은밀히 나돌던 시절이다. 우연히 보게 된 흑백사진 속의 한 인물이 느닷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후의 은신처에서 그의 편이었어야 할 바로 그 민중들, 마을 사람들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은 뒤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그가 법무아문으로 이송되는 사진이었다.

▦ 다리 부상 때문에 들것을 타고 앉아야 했다고 한다. 사진 속의 그 모습을 당시 일본 신문은 ‘병상이었지만 기력 안광은 예리하게 빛났으며…’라고 묘사했다. 1890년 고부군 동학접주가 된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간은 고부민란을 주동했던 1894년 1월부터 우금치 전투를 지휘했던 그 해 12월까지 채 1년이 못 된다. 그 1년이 내 고향과 나의 삶에까지 스며든 불후의 역사가 됐다. 엊그제 서울 종로(옛 전옥서 터)에 사진 속의 형상대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차가운 삶의 절벽을 향한, 그 절대적 눈빛이 새삼 떠오른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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