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지도자 체포됐다 풀려나
수만 명 시위 계속... 軍도 합류
대통령ㆍ총리 오가며 집권 연장
‘리틀 푸틴’ 사르키샨 결국 사퇴
러시아, 親서방 정권 수립 우려해
내정 개입 가능성이 불안 요소
“차르(러시아 전제 군주)를 무너트렸다. 이젠 군주정을 무너트릴 차례다.”
25일(현지시간)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열린 집회의 한 참가자가 자유유럽방송 특파원에게 한 말이다. ‘차르’는 이틀 전인 23일 사퇴한 세르지 사르키샨 총리를 가리킨다. 12일간 계속된 시위로 사르키샨 총리가 사퇴한 상황이지만 여전히 그를 보좌해온 집권세력(공화당)은 의회 다수 의석을 장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야권과 시민들은 이틀 만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시위를 이끈 ‘진정한 지도자’ 니콜 파쉬냔 시민계약당 의원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해 총선을 치르라며 여전히 의회 내 다수당인 집권 공화당과 카렌 카라페탼 임시 총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반정부 시위를 촉발한 것은 사르키샨 총리의 지나친 장기집권 욕구였다. 공화당 정권은 당시 대통령이던 사르키샨의 연임 제한을 앞둔 2015년 의원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시민 반발을 의식해 사르키샨은 당초 “총리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라고 약속했지만, 9일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자마자 총리로 추대됐고 결국 17일 총리직에 올랐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대통령과 총리를 오가며 집권을 이어가려는 모습이 마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연상케 했다고 논평했다.
이에 지난 수년간 공화당 정권에 불만을 품어 온 국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12일 100여명에 불과했던 집회가 11일만에 수 만명으로 늘어났다. 사르키샨 총리는 22일 형식적으로 차린 생방송 협상장을 박차고 나간 후, 파쉬냔 의원을 비롯한 시위 지도부를 체포했다. 지도부가 무너지면 시위대도 해산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시위대엔 핵심이 없었고 23일에는 군인들마저 시위대에 동참하는 등 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예레반에 거주하는 역사가 겸 정치분석가 미카옐 졸랸은 온라인매체 오픈데모크라시에 “계층과 취향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시위에 동참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가 2003년 조지아, 2004년 우크라이나 등에 이어 구 소련에 속했던 공화국 가운데 민주화 혁명에 성공한 나라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아르메니아 의회는 5월 1일 새 총리를 선출하기로 했는데, 공화당의 기대와 달리 반 정부 집회 규모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야 표 대결로 가면 파쉬냔 의원이 총리가 되기에는 표가 모자라지만, 아르메니아 거리 분위기는 이를 절대 용인하지 않을 태세다. 이에 맞춰 파쉬냔 의원은 대내외 정책 공약을 발표하는 등 발 빠르게 권력 인수 준비에 나섰다.
물론 무혈 민주혁명을 장담할 수는 없다. 마지막 불안 요소인 러시아의 개입 여부 때문이다. 민주화를 이뤄낸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도 결국 친서방 정권의 수립을 우려한 러시아의 개입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지아는 친러시아 정권이 수립됐고 우크라이나는 내전이 진행 중이다.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에서도 친러시아 성향 공화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아르메니아를 향해 “정치 위기를 대화로 극복하라”고 촉구하는 등 사태 개입 수순에 들어갔다.
이를 의식한 듯 파쉬냔 의원은 24일 각국 대사와 외신 기자들과 연쇄 회동해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외교 노선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영어신문 모스크바타임스는 “파쉬냔 의원 개인은 러시아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 왔지만,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아르메니아가 안보를 기댈 곳은 러시아뿐”이라고 지적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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