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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냉면과 랭면이 만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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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냉면과 랭면이 만나는 날

입력
2018.04.26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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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실향민의 향수 달래주던 냉면

여름철 별식, 국민 외식메뉴 정착

2005년 맛본 평양 랭면 잊지 못해

남북회담 소식에 냉면 생각부터

내 존재의 일부가 된 냉면 통해

무의식 중에 북한과 만나온 것

27일 열릴 남북정상회담만찬에 쓰일 만찬 메뉴가 24일 공개됐다. 사진은 북측의 대표적인 음식인 평양 옥류관의 평양 냉면. 평양냉면은 우리 측의 제의로 북측에서 준비해 만찬에 올리기로 협의됐다. 사진은 4월 초 평양을 방문했던 남측 예술단 일행에게 제공됐던 옥류관의 냉면. 연합뉴스
27일 열릴 남북정상회담만찬에 쓰일 만찬 메뉴가 24일 공개됐다. 사진은 북측의 대표적인 음식인 평양 옥류관의 평양 냉면. 평양냉면은 우리 측의 제의로 북측에서 준비해 만찬에 올리기로 협의됐다. 사진은 4월 초 평양을 방문했던 남측 예술단 일행에게 제공됐던 옥류관의 냉면. 연합뉴스

남북 정상이 만난다. 그 반가운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냉면 먹을 생각부터 했다. 고려 때부터 우리 민족이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냉면은 지금 남북한의 한식에서 단일 식단으로는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면은 세종대왕이 즐겨먹던 음식에도 들어갈 정도로 예부터 대접을 받았고 교방문화가 발달한 평양과 진주에서 한량과 기생들이 ‘선주후면’의 전통에 따라 해장음식으로 즐겼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건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호사가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해방 이후 냉면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에 의해 서민들에게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각 지역과 환경, 입맛에 맞는 형식과 실질을 갖추면서 나름의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차가운 국수’라는 외양과 동치미를 기본으로 한 육수의 독특한 맛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것이었다. 냉면은 실향민의 향수를 달래주던 위안의 음식에서 여름철 별식, 청소년과 여성,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외식 품목, 고기 요리를 먹은 뒤의 후식으로 새로운 입지를 개척해나갔고 최근에는 냉면 그 자체의 극진한 맛을 추구하는 하나의 문화로 부상했다.

냉면 중에서도 평양냉면, 곧 물냉면은 원래 동치미 육수를 만드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고도의 기술과 고급 재료, 정성이 드는 음식이라 가격도 비싼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이후 청소년과 여성, 직장인 사이에서 매콤하고 깔끔한 비빔냉면의 인기가 치솟음에 따라 냉면의 본산인 북한과 상관없는 값싼 ‘시장 냉면’이 탄생하고 슈퍼마켓에서 포장 냉면을 팔기 시작하면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한식당, 냉면 전문점까지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도록 냉면은 보편화되었다.

소설가 성석제.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성석제. 한국일보 자료사진

90년대 이후 짬짬이 해외의 북한식당에서나 북한에서 ‘평양랭면’을 직접 먹어봤다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면스플레인(전문가인 양 냉면을 설명하는 짓)’을 연상케 하는 언행으로 나 같은 ‘토종 냉면광’의 선망과 부아를 자아냈는데 드디어 나한테도 ‘원조 평양랭면’을 먹어볼 기회가 왔다. 2005년 남북작가회의가 열렸을 당시 평양의 고려호텔의 식당에서 처음, 제대로 맛본 ‘랭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내가 그동안 먹어온 숱한 냉면이 얼마나 개성적이며 다채롭고 풍성한 맛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평양 시내 서점에 가서 북한에서 출간된 ‘대중료리’를 사서는 맨 처음 펼쳐본 항목도 ‘랭면’이었다. 랭면이 있고 ‘평양랭면’이 있었으나 ‘함흥랭면’은 없었다. 내가 중학생 때부터 몸살 회복 기념으로 즐겨먹던 함흥냉면(비빔냉면)은 ‘농마국수’나 ‘비빔국수’에 가까웠다.

남북 정상이 회담을 가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는 그동안 냉면을 통해서 무의식 중에 냉면의 본산인 북한과 지속적으로 만나 왔던 것이었다. 음식의 민주성과 총체성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공동체의 성격, 환경, 문화, 역사까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공유하게 된다.

그래픽= 박구원 기자
그래픽= 박구원 기자

내가 두 번째로 북한에 다녀온 2007년 이후 남북관계는 차츰 경색되더니 마침내 교류가 완전히 끊어졌다. 남과 북이 모두 강대강의 대치와 조치로 다시는 서로 보지 않을 것처럼 맞서게 되었을 때조차 나는 줄기차게 냉면을 먹었다. 그럴수록, 그래도 냉면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냉면은 도로나 철도보다 더 완전하고 분명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남북 간의 소통 방식이었다. 내 존재의 일부가 냉면이라는 것은 그동안 먹었던 냉면의 양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다.

남북 정상이 만난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는 말은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백성이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짝사랑의 대상이 다른 삼각관계와도 같아 보이는 이 말을 곧잘 인용한 사람으로는 정도전, 세종대왕,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에서 ‘이민위천’이라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마침내 남북 정상이 만난다. 나는 냉면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또다시 ‘랭면’을 먹을 것이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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