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개봉한 ‘가게무샤(影武者)’는 일본 전국시대 지방영주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을 모티프로 한 영화다. 다케다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패권을 겨루다 전장에서 병사했다.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다케다 사망 후 그의 동생이 형의 대역(가게무샤)을 내세워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내용으로 각색한 이 영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구로사와 감독은 좀도둑이었던 가게무샤가 진짜 다케다인 듯 사고하고 행동하다 백성을 위해 힘쓰게 되는 모습을 통해 ‘위국위민’의 정치 구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소재, 플롯, 메시지 등 모든 면에서 ’가게무샤’를 쏙 빼닮은 영화가 2012년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다. 2014년 선보인 ‘나의 독재자’는 남북정상회담과 가게무샤를 소재로 삼았다. 무명배우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뒤 벌어지는 가족과의 갈등을 다뤘다. 이 가게무샤는 30년 이상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며 김일성ㆍ김정일 부자의 성격과 심리를 집중 연구한 김달술(88)씨가 실제 모델이다. 그는 요즘도 현역 시절 습관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김씨는 2000년 6월13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6일 전 청와대 모의회담에 참석, 4시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을 맡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회담 준비를 도왔다. 모의회담은 김 대통령이 김 위원장이 믿을 만한 인물인지 파악하기 위해 평양에 급파한 임동원 국정원장으로부터 “김 위원장이 충분히 대화 자격을 갖췄다”는 보고를 받고 난 뒤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김씨를 ‘위원장 동지’ 등으로 부르며 주한미군 철수 등 남북 현안에 대해 격론을 벌였고, 김씨는 철저히 김 위원장의 가게무샤로서 답변과 질의를 했다고 한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은 가게무샤를 참석시킨 모의회담은 갖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문 대통령이 그런 형식을 선호하지도 않는다는 게 이유다. 문 대통령은 2007년 참여정부 시절의 경험을 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처럼 회담 준비위원회를 설치한 문 대통령은 참모들과의 토론, 남북대화 유경험자의 과외 등을 통해 회담을 준비 중일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에겐 공개된 모든 참모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가게무샤인 셈이다.
황상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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