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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에서 발견된 백골의 정체는

입력
2018.04.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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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일본 미제사건 갤러리’는 일본의 유명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코도 항에서 바라본 하치조 섬 전경. 위키피디아
소코도 항에서 바라본 하치조 섬 전경. 위키피디아

어쩌다 섬으로 육지 사람이 들어오면 주민들은 환영하기 보다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수도 에도(江戸ㆍ지금의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 떨어진 고립무원(孤立無援) 화산섬에서 목숨을 이어가야 할 사람은 섬 주민의 가족이 아니면 당시 정부인 바후쿠(幕府) 눈밖에 난 사람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도 시대(1603~1867년)에만 2,000명 넘는 죄인이 이 곳으로 유배됐다. 섬 이름은 비단 한 필의 길이를 뜻하는 ‘하치조(八丈)’. 오래 전부터 비단이 유명한 데서 유래했다.

인구 7,300명의 평화로운 섬, 하치조가 죄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붐비기 시작한 건 1960년대부터다. 신식 도로가 깔리고, 땅이 개간되면서 육지에서 사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오롯이 지켜갔다. 장례 문화가 대표적이었다. 원주민들은 시신을 매장했다가 10년 정도 지나면 다시 꺼내 화장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섬의 공간 문제다. 하치조 섬의 면적은 약 69.48㎢ 정도로 경기 분당 신도시(69.77㎢) 만한 크기다. 즉, 묘지로 쓸만한 땅이 많지 않다. 때문에 매장한 지 수년이 흐른 시신은 화장해 추모공원 등으로 이장해야 했다. 그 자리에 눕게 될 또 다른 망자를 위한 배려였다.

두 번째는 ‘샤리토리(シャリトリ)’라는 독특한 풍습 때문이다. 하치조 원주민들은 시신이 부패해 유골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고인이 ‘평범한 개인’에서 가문을 지키는 ‘조상신’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신의 백골화가 상당히 진행됐다고 판단될 때, 무덤을 열어 조상신으로 승천하기 전 마지막으로 고인과 만나는 의식을 치렀다. 이어 술 또는 바닷물로 고인의 유골을 깨끗이 씻은 뒤 화장장에서 태워 이장했다. 하치조가 다른 섬보다 유독 화장장이 많은 이유였다. 일본 최대의 명절 오봉(お盆)을 코앞에 둔 1994년 8월 11일 아침. 마을 공영 화장장 직원들은 작업을 위해 화장로에 들렀다가 기묘한 풍경을 목격했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할 화장로 철판 위에 정체불명 백골이 놓여있던 것이다.

백골의 주인은 1명이 아니었다

하치조에서 엄수되는 모든 화장은 조례에 따라 마을 면장의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백골이 발견되기 전날 면사무소로부터 접수된 화장 신청은 없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화장이 진행된 건 8월 5일. 즉, 화장이 없던 5일 동안 누군가 화장로에서 시신을 태운 뒤 버리고 간 것이다.

충분히 범죄가 의심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나 면사무소의 태도는 침착하다 못해 차분했다. 앞서 언급한 ‘샤리토리’ 풍습 때문이다. 경제 사정이 넉넉치 못했던 누군가가 ‘몰래 화장’을 하고 도망친 것이라 이들은 생각했지만, 화장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신을 태울 때 필요한 전용 접시가 설치된 흔적이 없고 ▦급유 밸브가 단단히 잠겨 있었으며 ▦화장로 열쇠가 문고리에 가지런히 꽃혀 있었다는 점에서 백골은 이곳 화장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화장돼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며칠 뒤, 하치조 경찰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사건은 큰 반전을 맞았다. 백골 주인이 1명이 아닌 최대 7명으로 밝혀진 것이다. 특히 백골에는 어린 아이 것으로 보이는 뼈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당시 섬 공동묘지에 있던 무덤 64개를 두 차례에 걸쳐 전수 조사했다. 파헤침 등 최근 무덤에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있는지 확인했다. 말끔했다. 사유지에 조성된 무덤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치조정 공영 화장터 1층 조감도. 그림 왼쪽이 유골이 발견된 화장동이다. 하치조정 공식 홈페이지
하치조정 공영 화장터 1층 조감도. 그림 왼쪽이 유골이 발견된 화장동이다. 하치조정 공식 홈페이지

이제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외부에서의 유입이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이 추리의 발목을 잡았다.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망망대해의 섬으로 시신을 들여와 몰래 불태우고 도망친다는 말인가. 만약 시신 유기가 목적이라면 앞뒤가 더 맞지 않았다. 범행의 덜미가 잡힐 수 있게 유골을 화장장에 버젓이 버려두고 가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터.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승려들의 저주?

기근이 일상이던 1711년 하치조 마을의 어느 날. 에도로 가던 승려 7명이 섬 해안가에 표류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승려들은 며칠을 헤매다 마을 어귀에 간신히 다다랐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자비를 기대했다. 하지만 주민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외부인에게 음식을 베풀 여유가 없다.” 마을에서 쫓겨난 승려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나무껍질이라도 뜯어 먹으며 연명할 생각이었다.

그때, 마을 주민 누군가 말했다. “저 승려들은 요술을 부린다는데?”, “나중에 해코지하는 거 아냐?” 불행의 싹은 일찌감치 자르는 게 좋았다. 주민들은 산 근처에 함정을 만들어 승려들을 상대로 ‘인간 사냥’을 벌였다. 승려들이 모두 죽은 뒤, 마을에선 괴이한 소문이 돌았다. 소복 차림의 승려들이 밤마다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을 잡아가고, 논밭에 흉년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승려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 그들이 기거하던 산 정상 어딘가에 7개의 빈 무덤을 만들었다. 하치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승려의 저주’ 전설이다.

7명의 승려. 그리고 7명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 백골. 단순한 숫자의 일치였지만 1994년 하치조섬 사람들은 두 사건에 연관성을 부여했다. 사실 300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승려들이 뼈가 돼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괴기소설에나 나올 내용이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상당수였다.

백골이 1952년 하치조 섬 도로 공사 중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인부 7명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실제 이 사건은 당시 지역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됐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호사가들은 백골의 정체를 밝힐 근거를 만들기 위해 과거 마을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사고를 찾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일본 본토로 밀항하려다 실패한 중국인들의 시신이다”, “1800년대 초반 사망한 화교 승려들의 시신이다” 등 추측과 낭설이 주민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한 사진입니다. PX히어
기사 내용과는 무관한 사진입니다. PX히어

사이비 종교집단 소행설도

한편으론 백골의 정체가 사이비 종교집단 사람들이라는 설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1990년대 일본은 ‘옴진리교’ 같은 신흥 종교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하치조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적 치료를 부정하고 자연 본위 치료를 주장하는 A교단의 지부가 바로 하치조 섬에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어떤 신통한 치료로도 막지 못했다. 자연 치료를 받다 사망하는 사람이 생기면, A지부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교인들의 주검을 은밀히 처리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증거는 없다.

무성한 의문만 남긴 채, 7명의 유골은 1995년 3월 14일 하치조 섬 면사무소 복지과로 이관됐다. 그리고 같은 날, 이름 없는 항아리에 담겨 섬 추모공원에 봉안됐다. 현재까지도 유골 주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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