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動亂)에 반대해야 한다.”
1989년 4월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는 이 같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당시는 9일 전 심근경색으로 급사한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에 대한 대학생들의 추모 집회 물결이 이어지던 때였다. 한때 덩샤오핑(鄧小平)의 후계자로도 꼽힌 후야오방은 1987년 학생 시위에 미온적 대처를 했다는 이유로 실각했으나, 개혁 성향과 청렴한 이미지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부패 해결을 함께 요구한 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인민일보, 곧 당은 이런 목소리의 분출을 ‘동란’(폭동ㆍ반란 등으로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으로 규정했다. 사설은 평화적이었던 추모 시위를 “반(反) 공산당ㆍ반사회주의를 목적으로 한 계획적이고 사전에 모의한 음모”라고 봤다. ‘체제 전복을 꾀하는 반동 세력’으로 낙인 찍힌 학생들은 격분했고, 이 때부터 사태가 급변했다.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주로 열리던 학생 시위는 중국 전역 400여개 도시로 확산됐다. 노동자와 지식인도 결합하면서 시위대 숫자는 100만명을 웃돌았다. 후야오방 추모 열기는 정치적 성격이 강해졌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하지만 결말은 유혈 참극이었다. 당은 계엄령 선포(5월 20일)에도 불구,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가득 메운 대중들의 시위가 잦아들지 않자 결국 6월4일 0시를 기해 무력 진압에 나섰고, 민간인 수천명이 희생됐다. 중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인 ‘6ㆍ4 톈안먼 사태’다.
당 총서기로서 강경 진압에 반대하다 권좌에서 쫓겨난 자오쯔양(趙紫陽)은 훗날 인민일보 4월 26일자 사설이 톈안먼 사태의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했다. 가택연금 상태이던 2005년 숨진 그는 사후 4년이 지나서야 발간된 회고록에서 “덩샤오핑은 4월 25일 당 지도부와의 회의 때 학생 시위를 비판한 자신의 발언이 유출되는 걸 원치 않았지만, 다음날 인민일보에 해당 발언이 각색돼 실렸다”고 했다. 강경파였던 리펑(李鵬) 당시 총리가 덩샤오핑의 동의도 없이 사설 게재를 주도했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태 언급을 금기시해 온 탓에 정확한 진실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올해 29주기를 맞는 톈안먼 사태의 재평가가 요원한 가운데, 중국 민주주의는 오히려 거꾸로 가는 모습이다. 지난달 11일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이 삭제된 개헌안 통과로 시진핑(習近平) 현 주석은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톈안먼 시위의 학생 지도자였던 왕단(王丹)은 “신해혁명 이후 이뤄낸 역사의 퇴보이자 40년 개혁ㆍ개방의 철저한 부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톈안먼 사태 관련 용어를 인터넷 검색어에서 차단했던 것처럼, ‘시황제’와 ‘종신’ 등의 단어 검색도 막는 등 여론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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