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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속의 여론] “다들 왜들 그런지…” 당신도 자신에게만 관대하지 않습니까

입력
2018.04.21 09: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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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실히 세금 낸다”가 92%

“타인도 성실 납부”는 36% 그쳐

비뚤어진 잣대로 인한 갈등 커

#87%가 “남보다 시민의식 높아”

대부분 ‘워비곤 호수’ 주민인 셈

한국 특유 정치사회적 불신 탓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저축은행중앙회에서 열린 저축은행 최고경영자 간담회에서 잠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저축은행중앙회에서 열린 저축은행 최고경영자 간담회에서 잠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개혁의 기대를 안고 임명된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결국 사퇴를 했다. 피감기관이 부담한 해외 출장, 공적인 정치자금에 대한 셀프 후원이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사퇴의 근거는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이었지만,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은 행적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후임 인선은 물론 차제에 잘못된 관행을 제도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후속 조치들로 이어져야겠지만, 별도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만약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위법임을 확답하지 못하고 원장직을 강행했다면 실제로 ‘시민 눈높이’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정부 여당의 기대대로 국회의 관행이었다는 호소에 눈높이를 낮추었을까. 아니면 더 큰 역풍에 직면했을까. 대답이 쉽지 않다. 단순한 사퇴 찬반여론이 아닌 공적 책임에 대한 시민 스스로의 공적 의식과 시민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관대, 남한테는 냉정한 평가

한국리서치가 올 1월에 실시한 시민의 공적 책임에 대한 시민성 진단 문항 결과를 통해 시민 스스로의 평가를 살펴보자. 우선 시민으로서의 공적 의무인 세금 납부에 대해서는 92%가 “나는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데 동의했고, 83%는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관용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63%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설이 내 지역 집값을 떨어뜨려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님비를 뛰어넘는 성숙한 책임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다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40%만이 동의해 희생을 요구하는 공적 책임에는 공감대가 크지 않았다. 동시에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시민참여에 대해서도 35% 정도가 동의하는 수준에 그쳤다.

세금 납부… “나는” VS “우리나라 사람은”

그러나 내가 아닌 한국인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그림이 펼쳐진다. 주어를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꾸어 질문한 결과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응답은 3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장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82%고, “내 지역의 땅값을 떨어뜨리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설을 반대할 것”이라는 님비 인식도 83%나 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것”이라는 응답은 15%에 그쳤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에 대해서만 33%만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여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 나는 공적 책임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평균에 못 미친다는 이중적 인식은 전형적인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로 보인다.

[저작권 한국일보]워비곤/ 강준구 기자/2018-04-20(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워비곤/ 강준구 기자/2018-04-20(한국일보)

한국판 워비곤 호수 효과?

‘워비곤 호수’는 1970년대 미국 라디오 쇼인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에서 풍자 작가 개리슨 케일러가 만들어 낸 가상의 마을로 “모든 여성이 강하고, 모든 남성은 잘생겼으며, 모든 아이들이 평균 이상”이 살아가는 마을이다. 타인에 비해 자신의 능력을 평균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한국 시민성 인식에서 나타나는 워비곤 호수 효과를 검증해보기 위해 앞서 4점 척도로 측정한 시민성 관련 5문항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점수에서 우리나라 사람 전체(타인)에 대한 평가 점수를 뺀 합산 결과로 가칭 ‘워비곤 시민성 지수’를 만들어보자. 0점은 자신에 대한 시민성 평가점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점수가 일치하는 평균적인 응답자 집단을 의미하며 0점 이상으로 숫자가 클수록 자신에 대한 평가가 타인에 대한 평가보다 높은 점수를 준 집단이다. 반대로 0점 미만 점수는 타인보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못 미치는 경우다. 응답자 867명 중 0점 미만자는 전체의 3%,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와 자신에 대한 평가가 같은 0점 응답자는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87%는 자신이 우리나라 사람 평균에 비해 높은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 워비곤 호수 시민들인 셈이다. 1~3점 우세자는 33%, 4~5점 우세자가 31%, 자신에게 6점 이상 높은 응답을 한 응답자도 23%나 되었다(워비곤 지수 0점 미만층은 응답자의 3%에 불과해 분석에서 제외).

[저작권 한국일보]워비곤/ 강준구 기자/2018-04-20(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워비곤/ 강준구 기자/2018-04-20(한국일보)

이중잣대, 법 공정성과 정치 불신에 기인

일반적으로 워비곤 호수 효과는 자기 역량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의 시민의식 평가에서 나타나는 워비곤 호수 효과는 정치사회적 불신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신에 대한 평가와 타인에 대한 평가가 일치하는 평균집단(0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72%가 동의하지 않는다(매우 28%+약간 44%)고 답했지만, 워비곤 지수 상위집단(6점 이상)서는 무려 92%(매우 54%+약간 38%)가 법 공정성에 불신을 표명했다.

정치 신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은 다양한 집단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평균집단에서는 67%(매우 반대 24%+약간 반대 43%)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반면 상위응답 집단에서는 무려 82%(매우 반대 57%+약간 반대 25%)가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워비곤 호수 효과의 부정적인 효과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확인된다. 워비곤 호수 효과가 큰 사람들일수록 주관적 웰빙 상태가 나빠진다. 워비곤 지수 평균집단(0점)과 미세 우세 집단(1~3점)의 주관적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으로 높았다. 반면 중간집단(4~5점)에서는 5.8점으로 낮아지고, 6점 이상 상위집단에서는 5.5점으로 행복감이 급감한다.

눈높이에 부합하는 성찰과 개혁을

양 극단의 시민성 평가 중 어떤 모습이 진실일까? 개개인의 평가에서는 선진국 못지 않은 시민성을 뽐내지만, 타인에 대한 평가를 보면 공적 책임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나라다. 향후 심층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아마도 진실은 양 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정치가 작동하지 않을 때 거리로 나가 한국 민주주의를 바로잡은 힘도 한국 시민의 모습이고, 일상에서 대면하게 되는 이기적인 시민의 모습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김기식 전 원장의 문제가 눈높이의 조정이 아닌 낡은 관행의 개혁으로 귀결되어야 하듯이, 한국 시민사회의 이중성 문제는 자기 과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눈높이에 부합하는 부단한 자기 개혁의 노력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한울 한국리서치 여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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