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2009)’의 미국 버전으로 언급되곤 하는 ‘러들로 학살(Ludlow Massacre)’이 1914년 4월 20일 일어났다. 콜로라도 주 러들로 탄광 파업 농성 광부와 가족 등 20여 명이 숨진 사건이었다.
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은 백인ㆍ숙련노동자 중심 미국노동연맹의 독주 속에, 더 열악한 흑인ㆍ이주민ㆍ여성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해 1905년 결성된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조직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세를 불려가던 형국이었다. 광부 대부분이 임금 싼 그리스 이탈리아 세르비아의 이주노동자들이었고 서부광부연맹은 IWW 소속이었다.
광부들은 채탄량에 따라 급여를 받았고, 사측이 제공한 광산촌 숙소에서 기거해야 했다. 채탄량을 속이는 일, 광산촌 회사 직영 상점과 병원의 폭리, 잦은 사망사고 등 문제가 산적했지만, 사측 보안대는 기관총까지 장착한 개조 장갑차로 광부들을 억압했다. 가장 악명 높은 회사가 록펠러 가문의 콜로라도 퓨얼&아이언(CF&I) 사였다.
광부노조는 1913년 9월, 채탄가격 인상과 8시간 노동, 무임금노동(철로 부설, 갱지주 작업 등)에 대한 임금 지급과 채탄 무게 측정 시 노조원 입회 등 7개항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참가자 1,000여 명은 곧장 광산촌에서 쫓겨나 러들로 협곡 입구에 천막촌을 차려 농성을 벌였고, 사측은 보안대와 경찰, 주방위군을 동원해 그들을 위협했다. 록펠러 측이 주방위군 급여를 지급했다는 기록(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도 있고, 구사대가 주방위군 군복을 입었다는 설도 있다.
농성 텐트에 거주하던 한 아이가 숨져 장례식을 치르는 사이 보안대(방위군)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텐트에 불을 지르고 위협 총격을 가했다. 잦은 위협에 텐트 아래 대피호를 파두었던 농성자 가족 중 여성 4명과 어린이 11명이 질식사했고, 노조원 6명과 보안요원 1명이 숨졌다.
그 참극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전미광산노조가 ‘무장 호소문’을 발표했다. 철도ㆍ담배ㆍ피복 노조원들이 잇달아 무기를 들고 농성 현장에 결집했다. 뉴욕 등 전국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연방군을 투입해 69명의 사망자(정부 집계)를 내고 열흘 만에 진압했고, 4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됐다. 화재 참사 책임을 물어 주방위군 22명이 기소됐지만, 노조 지부장을 살해한 중위 한 명만 처벌을 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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