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이후 계속되는 외침
‘선진국’이 잘 팔리는 이유는
사람들을 부려먹기 딱 좋은
‘동원의 언어’이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는
오히려 선진국 집착에서 시작”
“우리가 선진국 수준으로 부상하자면 적어도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불 내지 5,000불대로 올라가야 합니다.” (박정희, 1979년 3월 연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21세기 초까지 반드시 명실상부한 선진경제대국이 되어야 합니다.”(김영삼, 1995년 11월 연설)
“국민 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고 쾌적한 환경과 능동적 복지 속에 삶의 질의 선진화를 이루어야 합니다.”(이명박, 2008년 7월 연설)
그 좋다는 ‘선진국’이란 녀석은 대체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을 걸까.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불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요, 올해엔 무려 3만 달러에 진입한다는데도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부활하고 있다’는 식의 앓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그 선진국이란 놈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으니 말이다. 고개 들어 남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가 애써 뒤적여 볼 필요는 없다. 선진국이 있다면, 그건 아마 당신 마음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두 붙잡고 참선이라도 해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 그렇다. ‘선진국의 탄생’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바로 그 선진국 개념을 추적해본 기록이다.
스스로를 ‘뉴’ 라이트라 부른 이들의 일부 사람들의 주장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건국’과 ‘부국’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는 의외로 대척점에 서 있다. 어린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난 ‘4ㆍ19’ 때문에 선수를 빼앗겼을 뿐, 박정희가 ‘혁명’으로 뒤집으려 했던 게 바로 그 이승만이었으니까.
대척점의 한 상징은 바로 ‘문명 담론’에서 ‘개발 담론’으로의 전환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은 한국을 긍정했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며 대통령을 했으니 긍정하는 것 말곤 별 다른 수가 있었을까 싶지만, 이승만은 이를 문명 담론으로 포장했다. 이승만이 보기에 당대의 한국은 좀 못 먹고 못 살아서 문제지 “유구한 전통과 역사, 예절과 도의가 있는 문명국, 개명국”이었다. 우리가 이미 문명국인 이상 가난은 수치라기보다는 조금 고쳐볼 그 어떤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승만이 내세운 건 ‘부강’이었다. “부강의 문명은 삼강오륜 등 도의가 바탕인 한국보다 한 수 아래지만, 그런 문명이 주동하는 약육강식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도 부강을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난 괜찮은데 세상이 이 모양이니 힘 좀 써보자는 얘기다. “전통적 농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에 뿌리를 둔 농촌 부흥에 대한 관심”은 산업화, 공업화를 내세운 발전 담론과 다르다. 그렇기에 이승만의 키워드는 재건, 자립, 부흥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이런 개념을 뒤집었다. 미국의 발전국가 개념을 앞장서서 수용하면서 스스로는 ‘후진(backward)’ 국가, ‘저개발(underdeveloped)’ 국가라 자임했다. 발전국가 개념은 2차 세계대전 뒤 냉전기에 접어들면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9년 제시했다. 요란한 포장지를 벗기고 나면 발전국가의 핵심은 소련과 맞서려다 보니 좀 덜 떨어진 국가들에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자유’와 ‘시장’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미국이 ‘스탈린식 중앙집권적 경제개발정책’이라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한국처럼 자본을 편중적으로 지원하는 제3세계 군부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발전국가 개념은 1949년에 이미 제기됐으나 이승만 때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앞서 봤듯, 이승만은 한국이 이미 문명국이라 봤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이 개념을 전면 수용했다는 것은 한국에 대한 비판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이자, 열렬하게 자기 비하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때 전통문화는 그저 허례의식으로 박멸되고 개선돼야 할 그 무엇이었다.
가난은 ‘문명국 한국’의 몇 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반만년 한국 역사의 모든 문제점들이 응집되어 터져 나오는 하나의 결절점이다. 박정희 스스로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어떠니, 동방예의지국이 어떠니 하고 우리가 서로 모두 다 자기도취해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박정희를 움직이는 건 우리 민족에 대한 수치와 우리 역사에 대한 혐오다. 오늘날 판치는 ‘헬조선론’의 기원도 어떻게 보면 의외로 박정희다.
박정희 이후에도 여전히 선진국은 멀다. 아니 가깝긴 하다. 다만 늘 선진국 문고리를 붙잡고 있거나, 문턱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1980년대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선진국은 돈 많이 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민의식을 갖춰야 한다 했다. 1990년대는 혀를 잔뜩 꼰 ‘글로벌 스탠다드’가 등장해 아직도 멀었다 했다. 2000년대에는 의식이 덜 떨어졌다며 다들 ‘선진화’ 노래를 불렀다.
근대화, 세계화, 선진화를 거의 40년 가깝게 외쳐왔는데, 우리는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여전히 선진국 문 밖에 서 있다. 아직도 멀었고, 여전히 멀었고, 앞으로도 계속 멀 예정이다. ‘문턱 위의 한국’은 늘 그렇게 두려움에 벌벌 떨며 문 밖에서 벌 서고 있다. 가끔 손가락에 침 발라 창호지에 뚫은 그 좁디 좁은 구멍으로 ‘과연 선진국이란 저렇게 천국이구나’ 착각도 해가면서.
선진국의 탄생
김종태 지음
돌베게 발행ㆍ330쪽ㆍ1만7,000원
원인은 간단하다. ‘선진국’이 잘 팔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 부려먹기 좋은, 동원의 언어여서다. ‘닥치고 선진국’,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행복해졌는가에 대해선 말이 없다. 저자의 호소는 이렇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는 선진국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진국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선진국은 달성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충실한 동안에 이뤄지는 것이다.” 옮겨놓고 보니 확실히 동원의 언어만큼 화끈하고 자극적인 맛은 덜하다. 하지만 선진화된 대한민국이라면, 이런 심심한 말도 잘 음미하지 않을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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