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선 김상현 前 의원 별세
한국 정치사, 특히 야당사에 최대 풍운아로 불린 후농(後農) 김상현 전 의원이 18일 역사의 뒤안길로 떠났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1971년 첫 대선도전 당시 그를 따르는 유일한 현역 의원이자, 후에 견제를 받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선도전에 힘을 보태기도 한 그는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최고의 달변가인 동시에 수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긴 김 전 의원이 떠나자 정치권의 수많은 인사들이 그를 추억하고 있다.
6선의 김 전 의원은 이날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전남 장성 출신인 고인은 29세였던 1965년 6대 국회 당시 서울 서대문을 재보선에 당선됐다. 국회 입성 이듬해인 1966년 3월 한일협정대일청구권자금 사용에 반대해 국회에서 4시간 30분의 필리버스터를 강행해 화제가 됐다. 1972년 유신반대투쟁으로 구속돼 17년간 공민권을 박탈당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됐다.
이처럼 고인은 10월 유신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야인 생활을 했다. 그가 우리 정치사에 남긴 대표적인 업적은 YS와 연대해 1985년 2·12 총선 압승을 일궈낸 일이다. 1983년 미국에 망명중인 DJ를 대신해 YS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띄워 의장권한대행을 맡고, 소석(素石) 이철승 등 비(非) 민추협 세력과 총연합해 신한민주당 돌풍을 성공시켰다. 전두환 정권 당시 관제야당으로 불리던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을 제치고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면서, 이 과정에 목숨을 걸고 귀국한 DJ와 함께 1987년까지 민주화 시위정국을 이어가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가 동교동계 지분을 대신했던 점이 DJ와 앙금으로 남았고, 급기야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이 분열했을 때 DJ의 평화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대선국면에서 YS에게 큰 도움을 줬지만, 시간이 흘러 YS가 1990년 3당 합당을 밀어붙이자 당시 노무현 의원과 함께 반대하며 민주당에 잔류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돼 재기에 성공했으나, 주류 정치권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마당발로 유명하다. 초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구해 성사되는 이례적인 일도 있었다. 고아원에서 생활한데다 소탈함,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 등이 비슷해 일본 정치 최대 거목과 비견되며 ‘한국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로 불리기도 했다. 말년엔 정치선배인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의 말상대 역할로 소일했다.
20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을에서 당선된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막내 아들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희원씨와 영호씨를 비롯해 3남 1녀.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1일. (02)2227-7500
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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