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의식 못 벗어난 국회에도 화살 돌려야
재벌금융개혁 추진의 당위성은 더 높아져
달라진 국민 눈높이에 기득권층 예외 없어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논란에서 청와대가 간과한 게 있다. 달라진 국민 눈높이다. 시대 상황과 사회 의식에 따라 국민 눈높이는 변하기 마련이다. 역사의 장을 바꾼 촛불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국민 눈높이는 몇 단계 상승했다. 공정과 평등, 정의의 눈금이 한껏 올라갔다.
김 전 원장의 피감기관 해외출장은 바뀐 국민 눈높이로 보면 임용 기준에 미달한다. 부적절한 후원금 사용은 편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오간다. 문재인 대통령이 “관행에 비추어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라면”이라고 제시한 거취 기준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과거의 관행’은 업그레이드 된 국민 눈높이에서 더 이상 면책사유가 될 수 없다. ‘평균’을 따지는 것도 지금의 시각에선 부차적이다.
그가 고위공직자, 더구나 금융개혁 책임자가 아니었다면 사태가 이토록 커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개혁의 칼을 들어야 하는 위치라면 사정이 다르다.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아 외유성 해외출장을 간 사람에게 금융개혁의 책임을 맡긴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김 전 원장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운동가로 공직자의 윤리와 도덕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터라 국민 눈높이는 더 엄격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때 달라진 국민 눈높이를 실감했다. 공정과 평등을 우선하는 젊은층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수습에 애를 먹었다. 반칙과 특권은 더 이상 관행이라는 말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김 전 원장의 처신은 국민들 눈에는 의원 신분을 이용한 불공정한 특권과 특혜로 비칠 뿐이다.
엄격해진 국민 눈높이는 김 전 원장뿐 아니라 국회에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국가정보원, 검찰 등 권력기관과 사법부는 어두웠던 과거와 결별하기 위한 개혁작업이 한창이다. 공정과 정의를 지향하며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국회만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의기구라는 이유만으로 견제 받지 않는 특권을 행사한다.
청와대가 16개 공공기관을 무작위로 뽑아 19ㆍ20대 국회의원들의 피감기관 해외출장 사례를 조사한 결과,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이 각각 94차례와 65차례였다. 고작 16곳만 살펴본 게 이 정도니 피감기관 수천 곳을 조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만하다. 이러니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정치후원금 땡처리도 도긴개긴이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19대 의원들의 정치자금을 분석한 결과, 조사대상 143명 중 55%에 달하는 78명이 정치후원금을 직원들의 퇴직금 및 상여금으로 지급했다. 심지어 정치후원금으로 가전제품을 사들인 의원까지 있다고 한다.
국회는 최근 법원의 특수활동비 내역 공개판결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특활비 내역을 공개하면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노출돼 국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황당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6ㆍ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한국당이 기초의원 4인 선거구를 최소화한 것도 거대 양당의 갑질이다. 지방의회를 독과점해 지역 토호세력과 결탁하고 온갖 특권적 이익을 누리려는 탐욕스런 행태다. 국민 눈높이에서 보면 지금 국회야말로 청산해야 할 적폐 중의 적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판이 오죽 혼탁하면 ‘드루킹’이라는 선거브로커가 대가를 바라고 인터넷 여론조작을 하며 활개를 치겠는가.
항간에는 김기식 흔들기의 배경에 개혁에 저항하는 금융권과 특정기업이 있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 금융권 채용비리에서 드러났듯이 금융은 개혁 성과가 더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과감한 선택일수록 비판과 저항이 두렵다”고 인사의 고민을 털어놨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강력한 인물을 골라 금융개혁을 이뤄 내야 한다.
김기식 사태는 공정과 정의가 시대정신으로 우뚝 섰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웠다. 특권과 갑질이 판치던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국민은 모두 아는 사실을 권력 가진 이들만 모른다는 게 답답하다.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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