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영국의 한 컨설팅업체(Creators Synectics)가 영국인 4,000명을 상대로 ‘동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천재’를 뽑는 설문조사를 벌인 일이 외신으로 소개된 일이 있었다. 조사 결과 공동 1위에 뽑힌 이는 환각제 LSD를 합성한 스위스 화학자 앨버트 호프만(Albert Hofmann, 1906~2008)과 월드와이드웹으로 인터넷 시대를 연 팀 버너스 리였다. 스티븐 호킹(7위)이나 넬슨 만델라(5위)가 1위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호프만이라는 상대적으로 낯선 과학자가 1위를 해서 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LSD(Luysergic acid diethylamide)의 대중성과 문화적 영향력 등 면에서 압도적인 점수를 얻었다.
호프만은 스위스 바덴에서 태어나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 바젤의 한 제약회사(Sandoz, 노바티스의 자회사)에서 일했다. 호밀에 기생하는 맥각균의 활성성분을 연구해 신약을 개발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맥각균은 중세 이래 자궁수축 등 효능이 알려져 더러 쓰였지만 이상 출혈 등 부작용이 커서 제약연구 분야에서 주목하던 터였다.
LSD는 1938년 맥각균에서 추출한 그의 25번째 활성화합물이었다. 연구 목적은 부작용 없는 혈액순환 촉진제를 개발하는 거였지만 LSD에 그 효능은 없었다. 실망한 그는 근 5년간 LSD를 방치했고, 43년 4월 16일에야 다른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재합성을 시도했다. 그 실험 도중 실수로 합성물질을 미량 흡입한 뒤 환각을 경험하고는 사흘 뒤 250마이크로그램을 의도적으로 투입했다. LSD효과로 잘 알려진 변화무쌍한 색채감과 환상적인 이미지, 공포감과 극도의 희열감 등을 확인, 연구실에 그 사실을 공유했다. 회사는 곧장 정신질환 치료제로 LSD 특허를 냈고, 50,60년대 기적의 신약으로 유럽과 미국 각지로 보급됐다. 63년 특허 만료와 함께 사실상 마약으로 사용이 규제되는 등 곡절을 겪지만, LSD는 이미 히피와 반문화, 락 등 음악과 문학, 영화 등 예술 전반의 혈관 속으로 스민 뒤였다.
71년 은퇴한 뒤 독자적인 연구를 이어갔던 호프만은 만년까지 LSD를 ‘영혼의 치료제(Medicine of Soul)’라며 옹호했고, 규제가 시행된 뒤로도 간간히 합성해 투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네 자녀를 두고 102세까지 장수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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