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숙 (주)가구아마존 대표
이야기의 시작은 IMF였다. 실직과 명퇴가 줄을 잇던 시절이었다. 부부는 차라리 사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자리만 제대로 잡으면 월급쟁이보다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일종의 역발상이었다. 남편이 먼저 사표를 썼고, 임상병리사로 일하던 아내 역시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문정숙(56) (주)가구아마존 대표의 인생 2막은 그렇게 열렸다. 1998년, 퇴직금과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작은 창고를 샀다. 이후 가구유통업체를 운영하면서 10년 가까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구유통업체로 이름을 날렸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터득한 사업 노하우
사업 아이디어는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대학시절 아버지가 가구 제작과 유통에 뛰어들었다. 가구 공장을 차려서 거기서 만든 제품을 트럭에 싣고 가구상에 공급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구 유통업의 메커니즘을 배웠다. 동시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면 훨씬 사업이 수월할 텐데, 하는 생각도 했었다.
사업을 결심하고 업계를 조사해보니 아버지가 사업하던 시절의 구조적 모순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엔 도매업자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와 가구점을 찾아다녔다. 큰 공장은 대리점을 운영했지만, 가구점과 마찬가지로 딸린 창고가 협소했다. 도매업자의 운송 트럭이 수시로 공장과 가구점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문 대표는 4층 건물 13만 제곱미터의 공간을 마련했다. 대형창고에 물류를 집중시켜 운송비를 줄이고 여러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 자리에 볼 수 있게 하자는 전략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가구점들은 싼 가격에 다양한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대형창고를 갖춘 도매점의 등장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후 대구 경북 1,000여개의 인테리어 업체와 가구점 등에 가구를 공급했다. 10년 가까이 전국 최고의 가구유통업체로 자리매김했다.
개업식 때 들어온 쌀 930kg, 달성군 사회복지과에 기탁
2013년 대구 서구 이현동에서 달성군 다사읍 성서5차산업단지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변신을 꾀했다. 도매업에서 온라인을 바탕으로 한 소매업으로 사업확장을 준비했다. 전국 배달이 가능하게끔 소파를 중심으로 포장 시스템을 구축했다. 올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한다. 이를 위해 본사를 옮길 무렵 중국 칭다오에 세운 공장에서는 소파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도 펼치고 있다. 우선 개업식부터 남달랐다. 화환 대신 들어온 쌀 930kg과 현금 500만원을 달성군 사회복지과에 기탁했고, 달성군에 착한기업으로 등록해서 매월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있다.
2016년 여름엔 젊은 소상공인들을 위한 정기 장터를 시작했다. 2016년 여름 ‘문 페스티벌’을 열어 100명의 소상공인을 가구전시장 앞마당으로 초대했다. 작은 무대를 만들어 난타 공연 등을 진행해 문화와 쇼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후 봄부터 가을까지 2~3달에 한번씩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전시관은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있도록 ‘아트 갤러리’라는 푯말을 달았고, 2층에는 소규모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그랜드 피아노까지 들여놨다.
암으로 입원, 20년 만의 휴가
사업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20년, 2018년은 문 대표에게 가장 특별한 해다. “인생을 한번 더 사는 기분”이라고 고백한다. 사연이 있다. 2017년 한 해 동안 일을 쉬었다. 병마와 싸웠다. 2016년 말, 갑자기 살이 20kg나 빠지고 자꾸 견디기 힘들 정도로 피곤해져서 병원에 갔더니 편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임파선까지 전이되었고, 목 밑으로 내려가기 직전이었다. 병원에서는 일단 방사선을 몇 번 쬔 뒤에 수술을 하자고 했다. 일을 모두 내려놓고 입원했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셈이었는데, 이상하게 행복했어요. 병원에 눕는 순간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왜 그런가 생각해봤더니,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휴가를 맞은 것이더군요. 철 들고 한번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머니의 슈퍼마켓에서였다. 맏딸이었던 문 대표는 어머니와 함께 슈퍼마켓을 운영하다시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대학도 2년 정도 쉬었다가 입학했다. 학비를 아르바이트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수업을 들었다. 졸업 후엔 곧장 임상병리사로 취직했고, 남편의 실직 이후로 악바리처럼 일만 해왔다. 친구들이 “너 그러다 쓰러진다”고 충고했지만, 귓등으로 들었다.
“일에 미쳐 살았어요. 그 덕에 남부럽잖은 성과를 냈지만, 동시에 제 삶 자체를 위협했던 거죠.”
어제의 불행과 악착같은 삶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결국 수술 없이 치료가 끝이 났다. 기적적으로 방사선 치료만으로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 1년 동안 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는 살기 위해서 쉬어야 할 상황이 된 거죠. 어떻게 쉴까 고민했어요. 나에게 선물을 주자 싶었어요.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았죠.”
결론은 공부였다. 친구들이 공부를 계속해 석사와 박사를 따고 대학교수로 자리 잡는 모습이 몹시 부러웠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그 길고 깊은 아쉬움을 이참에 풀어보자 싶었다.
“일단 대학은 결정했는데, 뭐로 석사를 하고 박사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대학 과정이 3년쯤 걸릴 것 같은데, 졸업장을 받을 즈음엔 답이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주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유를 즐기면서 삶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다.
“어제의 모든 일들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힘든 학창시절을 보낸 것도, 일에 미쳐 지낸 것도, 또 큰 병을 겪은 것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드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비뚤어졌거나, 건성 건성으로 시간만 때웠거나, 초긍정적인 마음으로 암 치료에 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뒷걸음질 치지 않고 과감하게 맞붙어서 아등바등 싸우는 것, 그것이 가장 훌륭한 질곡 극복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하고 깨달았던 것들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더 훌륭하게 살고 싶다”면서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화이팅을 외쳐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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