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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다키스트 아워’의 오해

입력
2018.04.1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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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2주 앞둔 11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유엔사령부 경비대대원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뉴스1
남북정상회담을 2주 앞둔 11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유엔사령부 경비대대원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뉴스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지도자들을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ㆍ가장 어두운 시간)’가 올해 초 개봉했다. 처음엔 윈스턴 처칠 총리 역을 맡은 배우 게리 올드먼의 연기가 화제였다. 뒤늦게 출장 중 기내에서 영화를 보는데 처칠보다는 직전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에 눈이 갔다.

영화는 그를 아주 유약하고, 정략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영화 첫 장면도 1940년 5월 의회에서의 탄핵 논의로 시작한다. “그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는 무방비로 나치 도발에 직면했다. 전쟁이 터졌다. 평화 시에도 유능한 총리가 아니었던 그가 전시에 우리 리더가 될 수 없다.” 야당 지도자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체코, 폴란드를 집어삼킨 독일이 벨기에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켜 서유럽을 노리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직전이라는 위기감이 영국을 지배하던 상황 때문이었다.

영화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처칠 영웅담으로 막을 내렸다. 처칠 어록인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마지막 자막에 띄우며 체임벌린의 협상론은 무용했음을 강조하는 듯 했다.

실제로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히틀러에게 체코 주데텐란트를 양도하는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1년 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며 체임벌린의 협상은 조롱거리가 됐다.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은 ‘상대국의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 양보ㆍ타협을 위주로 하는 무마정책’으로 정의되며, 어리석은 외교정책의 상징처럼 낙인 찍혔다.

지난해 5월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수 야당이 덧씌우려 했던 이미지도 ‘한국의 체임벌린’이었다. “국제사회와 공조하고, 대화와 제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을 대화로 이끌고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성공시키겠다”는 문 대통령의 북핵 해법을 야당은 유화정책이라고 비꼬았다.

북한까지 탄도미사일 발사, 6차 핵실험 등으로 문 대통령의 대화 노력을 외면하자 상황은 꼬여갔다. 한반도엔 전쟁 직전 위기감이 가득해졌다. 야당은 북한의 도발과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싸잡아 비난하며 기세를 올렸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히틀러에 속아 대독유화정책으로 2차대전의 참화를 초래한 챔벌레인 수상의 교훈”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하지만 유화정책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지난해 말과 180도 달라진 한반도 주변 정세는 북한의 전략적 선택 덕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문 대통령의 일관된 협상 제의가 먹힌 측면도 크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에 대한 물밑 설득ㆍ중재 노력이 있었고, ‘전쟁은 반대하나 도발에는 단호히 맞서겠다’는 의지 표명도 한몫 했다. 1930년대 쇠락하던 영국의 국력, 대서양 건너 동맹국 미국의 방관 상황을 고려하며 히틀러와 타협해 시간을 벌고자 했던 체임벌린과, 독일에 맞서 싸울 때는 강력했던 처칠까지 두 사람의 장점이 모두 녹아 있었던 것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가 지은 ‘협상의 전략’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협상은 전쟁만큼 어렵다.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또 극도의 불신관계에서는 상대의 약속을 믿기도 어렵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은 한쪽의 굴욕이 아니라 협상 상대와의 공존, 공생, 공영을 추구한다. 유화정책의 핵심도 협상이다. 체임벌린의 뮌헨협정이 히틀러의 개전을 1년 늦춰 결국 연합국 승리를 가져왔다는 역사적 해석도 있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부터 시작해 북미ㆍ남북미 정상회담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동결-불능화-검증-폐기로 이어지는 2년 이상의 비핵화 과정에서 언제든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 그때마다 또 “유화정책의 문제” 운운하며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래도 해법은 대화와 협상이다. 흔들림 없는 원칙을 기대한다.

정상원 정치부 차장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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