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싱글족의 ‘자취방 꾸미기’ 열풍
벽지 장판 갈아엎는 막일부터
부엌 싱크대 교체 대수술까지
가구 소품 바꿔 소소한 변신도
“삶의 질 중요시하는 의식 변화
물질적 혜택 이상의 가치 추구
내 집 마련 못하는 현실 반영도”
“내 집 마련을 마냥 기다리기보단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방에서 살고 싶었어요.”
바리스타 전인주(29) 씨는 2월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15.5㎡(3층) 규모 원룸을 전세(4,500만원)로 계약했다. 근방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었다. 하지만 생애 최초 자취방의 첫인상은 ‘곰팡이가 덕지덕지 핀 벽지, 실 생활공간 6.6㎡의 낡고 좁은 공간’이었다. 전 씨는 “계약이 끝나는 2년 후에 이사를 가야 할 수도 있지만, 직접 발 디디고 있는 기간 동안은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며 “셀프 인테리어를 결심한 이유”라고 말했다.
출발은 벽지였다. 친환경 페인트(흰색) 1통(4ℓ)을 3만5,000원에 샀다. 유튜브의 수많은 ‘셀프페인팅’ 영상을 스승으로 모셨다. 곰팡이 벽면은 벽지를 뜯은 후 ‘퍼티(벽면 갈라짐ㆍ구멍 메워주는 재료) 바르기→사포질→초벌 페인팅(젯소)’의 기초작업을 거친 후 페인트를 발랐다. 나머지 면은 기존 벽지 위에 발랐다. 흰색 페인트에 검정 색소를 섞어가며 은은한 회색을 찾았다. 전 씨는 “꼬박 이틀 걸렸다”며 “벽을 회색 톤으로 구성해 모던한 분위기를 줬다”고 설명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 방의 치수(가로ㆍ세로)를 줄자로 잰 후, 가구배치 ‘시뮬레이션’을 했다. 화장실을 제외하고 2평에 불과한 공간에서 오차는 곧 ‘폭망’(폭삭 망함)이다. 이후 책상ㆍ의자ㆍ책장ㆍ매트리스ㆍ행거(2개) 등을 샀다. 모두 ‘올 블랙’ 가구다. 블랙(가구) 앤 그레이(벽) 콘셉트다. 마지막 데코레이션으로 노란 조명과 스피커를 책상에, 모자 걸이용 네트망을 벽에 배치했다. 총 비용은 100만원 미만. 하지만 비용 대비 만족감은 비교불가다.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내 손으로 꾸몄기에 ‘나만의 공간’이란 애착감이 크다”며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카페에 앉아있는 기분이 드는 등 정신적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사회 초년생, 대학생 등 20~30대 ‘원룸족’을 중심으로 ‘자취방 꾸미기’(셀프 인테리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2014년 기준 만 29세 이하 1인 가구의 평균 주거사용면적은 30.4㎡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은 ‘내 집 마련’이란 기약 없는 미래를 위해 비좁은 전ㆍ월세 자취방이란 현실을 더 이상 감내하지 않는다. 대신 벽지와 장판을 갈아엎고, 가구와 소품을 바꾸며 자신의 ‘감성’을 공간에 새긴다. 셀프 인테리어 정보공유 애플리케이션 ‘오늘의 집’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버킷플레이스의 이승재 대표는 “2014년 7월 서비스 개시 이후 가입자들이 올린 셀프 인테리어 사진이 10만장을 넘어섰다”며 “최근 사진 등록이 더욱 가파르게 늘고 있다”고 밝혔다.
“낡고 칙칙한 부엌은 못 참아”
건축설계사 도승아(37) 씨에게 부엌은 집의 ‘중심’이다. 평소 직접 요리하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며 노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는 3년 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다세대주택(4층) 내 43㎡ 규모 원룸을 전세(1억4,000만원)로 얻었다. 창이 난 쪽이 도로에 접해 강남에서 흔치 않게 탁 트인 개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칙칙하고 낡은 부엌이 성에 차지 않았다.
‘대수술’이 시작됐다. 도 씨는 부엌 벽면에 붙은 우중충한 연두색 시트지를 뜯어내고 시멘트 벽면에 회색 톤의 타일을 붙였다. 그는 “시트지 제거는 바닥에 붙은 껌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과 같다”며 “노가다(막일) 중의 노가다”라고 말했다. 부엌의 ‘얼굴’인 싱크대 상판도 교체했다. 기존 스테인레스 상판을 뜯어내고, 이케아에서 10만원에 산 우드 재질 상판을 달았다. 건축분야 종사자에게도 부엌 개조는 ‘고(高)난도’였다. 그는 “싱크대 공사는 톱, 전동드릴 등 각종 공구가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라 인터넷을 참조했다”고 말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후 레일등(일자형 트랙조명)을 달고, 부엌 근처에 친구들과 함께할 대형 책상(가로1.5mㆍ폭0.75m)을 배치했다. 부엌을 포함해 벽면 페인팅, 장판교체, 가구배치 등 모든 작업에 3개월이 걸렸다. 그는 “200만원 정도 들었는데 세탁기 등 가전제품 구입과 이사비 등을 제외한 순수 인테리어 비용은 이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달 월세 수준으로 자취방 ‘환골탈태’에 성공한 경우도 있다. 이대로 (22) 씨가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 13㎡ 규모 원룸 인테리어에 들인 비용은 약 45만원이다. 누런 하늘색 ‘구름’ 벽지와 노란색 침구가 깔린 ‘유아용’(?) 공간은 흰색 톤과 우드 컬러가 어우러진 20대 청년의 ‘감성’ 자취방으로 변모했다. 이 씨는 “셀프 페인팅 10만원에 가구 및 소품 구입비 35만원 정도가 들었다”며 “예쁜 공간에서 공부나 일을 할 때 집중력이 높아지는 경험은 셀프 인테리어를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셀프 인테리어족(族)’들이 벽지를 뜯어내는 등 ‘공사’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가구를 교체하거나 작은 소품을 다는 등의 소소한 ‘저(低)난도’ 공법이 대세다. 인천 서구 당하동 16.5㎡ 규모 원룸에 사는 김한솔(35ㆍ남) 씨의 인테리어 원칙은 ‘한달 10만원 이하로 가구ㆍ소품 등에 투자’이다. 김 씨는 “책상을 교체하고 스탠드ㆍ무드등 등 간접조명을 여러 개 달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내 삶이 더 중요하다”며 “소소한 인테리어 이후 열심히 일하는 보람도 느끼고, 외로움도 덜해지고 긍정적인 변화가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셀프 인테리어 ‘붐’ 배경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 부모 세대와 달리 삶의 질을 중요시하는 2030의 의식변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한다. 1인 가구의 소비 트렌드를 분석한 ‘1코노미’의 저자인 이준영 상명대 교수는 “젊은 1인 가구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케렌시아’(Querenciaㆍ안식처)로 꾸미려는 성향이 강하다”며 “또한 자신이 가치를 두는 분야에 아낌 없이 투자하는 ‘포미(For me) 족(族)’ 트렌드도 엿보인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도 “기성세대가 의식주 등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한 ‘역경의 세대’라면, 청년들은 기본적인 물질적 혜택을 누리며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혜택의 세대’”라며 “젊은 계층이 ‘핫(hot)’한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것처럼, 주거공간에 대해서도 편안함과 안락함 등 웰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에 ‘금수저’가 아닌 이상 청년층이 자력으로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거론된다. 곽 교수는 “불황일 때 낮은 가격으로 기분 전환이 가능한 립스틱 등 저가 상품의 판매가 늘어나는 ‘립스틱 효과’로도 설명할 수 있다”며 “큰 것(내 집 마련)을 누릴 수 없을 때 소소하게 인테리어를 하며 행복을 느끼는 측면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시장 변화도 셀프 인테리어 ‘붐’의 토양이 되고 있다. 이 교수는 “수십 년간 사용하는 내구재를 뜻하던 가구의 개념이 이젠 1~2년간 쓰고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패스트 퍼니처’(Fast Furniture)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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