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마녀전’ ‘나의 아저씨’ 등
불륜ㆍ욕설ㆍ갑질 등 등장
“입소문만 퍼진다면…”
방송사는 잇단 비판에 무반응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밥과 찬을 천천히 씹고 삼켜야 제대로 된 포만감을 느낀다. 드라마라고 다를까. 발단과 전개가 절정과 결말을 향하며 표현 강도를 높여야 시청자들의 만족감은 최고치로 향한다. 하지만 요즘 국내 드라마는 ‘조급증’에 빠졌다. 첫 회부터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불륜은 기본이고, 과격한 욕설에 살인까지 등장시키며 ‘입소문’에 목을 매고 있다.
첫 회부터 시선 끌기… 폭력ㆍ선정성 도 넘어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첫 회(3월 21일)부터 도마에 올랐다. 일명 ‘아이유 폭행장면’이 논란이 됐다.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이 사채업자 이광일(장기용)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너무나 사실적인 묘사라 안방을 놀라게 했다. 이광일이 이지안을 두 손으로 잡아 밀치고, 배를 주먹으로 가격하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대사도 폭력성을 거들었다. “네 인생 종쳤어, 이 X야. (중략)질질 짜면서 죽여달라고 빌어봐라, 내가 죽여주나.” 시청자들에게 불쾌함을 주기 충분했으나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SBS 주말드라마 ‘착한 마녀전’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3일 첫 방송에서 일명 ‘땅콩회항’으로 잘 알려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항공사 전무 오태리(윤세아)가 비행기에 탑승해 서비스가 잘못됐다며 승무원을 질책하는 장면이었다. 오태리는 소리를 지르며 승무원의 머리 위에 라면을 쏟아 부었다. 같은 날 방영된 2회(중간광고로 방송사 주장 횟수는 3, 4회)에서도 오태리가 전시회에서 큐레이터의 머리채를 붙잡고, 뺨을 때리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재벌가의 이중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는 장치로 해석될 수 있으나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나의 아저씨’와 ‘착한 마녀전’은 그나마 약과. 지난달 22일 종방한 SBS 수목드라마 ‘리턴’은 드라마 초반에 사활을 건 듯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로 첫 회(1월 17일)를 장식했다. 오태석(신성록)과 김학범(봉태규)이 신체 노출이 심한 여자들을 배경으로 카드놀이를 하고, 오태석의 상반신을 보여줄 때는 뒤에 서 있는 여성의 가슴이 부각됐다. 김학범은 여성의 머리를 유리컵으로 내려치고 머리채를 잡았다, 그는 친구의 아내와 강제 키스를 하기도 했다. 강인호(박기웅)는 내연녀에게 “넌 내 변기”라며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는 ‘리턴’에 법정제재인 경고를 내렸다.
“비난도 즐겁다”는 방송계
드라마들이 ‘첫 회 선정성 강박’에 빠진 배경에는 시청률이 있다. 비판이 예상된다 할지라도 자극적인 장면을 넣어야 초반부터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을 수 있고 고정 시청층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
MBC 수목드라마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의 첫 방송(3월 21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청자 모으기에 나섰다.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스타 작가나 톱스타를 기용하지 않은 드라마들은 첫 회에 힘을 줄 수밖에 없다”며 “첫 회로 입소문을 타고 화제가 되어야 어느 정도의 시청률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한 드라마 홍보대행사 관계자는 “첫 회에서 논란이 일더라도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면 방송사나 제작사 등은 싫어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문제적 장면으로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비판을 받아도 “방송가에서 화제만 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선정성과 폭력성이 높다 해도 성인용이면 그나마 비판을 피할 여지가 있다. 문제는 방송 첫 회부터 논란을 일으키는 드라마들의 시청등급이다. 이들 드라마 모두가 15세 이상 시청가다. 청소년 보호 시간대에 자극적인 드라마를 방영되고 있으니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다. 하지만 방송 관계자들은 폭력성과 선정성에 대해 무감각하다. 지난 2월 ‘리턴’이 전체회의에 상정되기 전 열린 방통심의위의 방송소위원회에서도 이런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그러나 의견진술에 나선 박영수 SBS 드라마 책임프로듀서(EP)는 “요즘 고등학생들이 영화나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수위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더 강력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15세 (관람가)영화들에 비하면 ‘리턴’은 (폭력성 등이) 강하다는 생각을 안 했다”며 “초반 몇 회에 대해 고민했지만 15세 등급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보다 접하기 쉬운 방송의 특징을 무시한, 부적합한 발언이었다. 심의위원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방송에 내보냈다”, “지상파 방송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혀 없다”, “청소년 보호 시간대에 대한 관계자들의 의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경고’를 의결했다.
방송 제작진의 안일한 인식은 ‘리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tvN 운영사인 CJ E&M은 ‘나의 아저씨’의 폭력적인 장면에 대한 비판이 거센데도 “인터넷 다시보기나 VOD 서비스에서 문제의 장면을 편집할 구체적 계획은 없다”고 10일 밝혔다. CJ E&M은 앞서 “(‘나의 아저씨’의 등장인물인) 이광일과 이지안의 관계가 회를 거듭하며 풀려나갈 예정이니 긴 호흡으로 봐주시길 부탁드린다”며 “시청자분들이 불편하게 느끼셨을 부분에 대해서 제작진이 귀담아 듣겠다”는 입장을 표했다. 해당 장면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사과나 후속 조치는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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