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항상 처음이야, 만날 땐 모두 처음이니까.” “첫 사랑도 아니고 첫 불륜. 뭔가 더러운데 신선해.” 맛깔스러운 대사의 향연에 쉴새없이 웃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바람난 네 남녀의 아슬아슬한 애정사를 그린 영화 ‘바람 바람 바람’(감독 이병헌)은 ‘뭔가 더러운데 신선한’ 성인용 코미디다. 5일 개봉해 8일까지 관객 61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불륜 경력 20년을 자랑하는 석근(이성민)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삼매경에 빠진 여동생 미영(송지효), 늦바람 난 미영의 남편 봉수(신하균), 치명적 매력을 지닌 여인 제니(이엘)는 ‘불륜’이라는 공통 키워드로 얽히고 꼬인다. 기혼 남녀의 일탈 욕구를 자극하면서도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어 뒷맛이 깔끔하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성민은 “확실히 기혼 관객이 공감을 많이 하더라”며 “덕분에 소재에 대한 걱정과 부담을 덜었다”고 말했다. 이성민의 아내는 “더 과감하게 표현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관람평도 남겼다고 한다. 그는 “결혼 생활 20년이 가까워진 여성의 눈은 좀 다르더라”며 껄껄 웃음도 보탰다.
기혼자들은 결혼을 했기에 더 외롭고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혼 남녀에겐 알쏭달쏭한 얘기다. 이성민이 예시를 하나 들었다. 남자친구 혹은 남편이 갑자기 몸 만들기를 한다면? 미혼 여성은 남자친구의 멋있어진 모습을 기대하며 좋아하지만, 기혼 여성은 “혹시 바람 났냐”면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낸다는 우스개였다. “결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서가 있어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렇다고 불륜을 미화하는 건 아닙니다. 불륜을 희화화하고 풍자한 판타지로 이해해 주세요.”
이성민이 연기한 석근도 풍자적인 캐릭터다. 세계를 누빈 전직 롤러코스터 디자이너인 석근은 자신이 만난 여성들의 신체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었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카사노바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불륜도 끊고(!) 후회로 얼룩진 나날을 보낸다. “디자인을 핑계로 불륜을 합리화하는 석근이 비열하게 느껴졌어요. 감독도 같은 생각이더군요. 그래서 석근을 비난하는 의도를 담아 풍자적으로 표현했죠. 반전 이후에는 석근의 감정 변화를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이성민의 뻔뻔한 코미디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로봇, 소리’(2016)와 ‘변호인’(2013), 드라마 ‘미생’(tvNㆍ2014)과 ‘골든타임’(MBCㆍ2012) 등에서 보여 준 진솔한 인간미에 익살스러움을 더했다. 상대 배우와 주고받는 연기 호흡도 탁구 랠리처럼 쫄깃하다. 이성민은 “코미디 장르를 특별히 좋아한다”며 “제대로 웃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코미디의 본령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웃음으로 승화해 풀어 내는 데 있어요. 굉장히 고급 장르인 셈이죠. 드라마가 카타르시스를 지향한다면, 코미디는 진지한 흐름을 중간중간 웃음으로 깨버려야 해요. 이성이 개입하는 거죠. ‘바람 바람 바람’도 그런 영화예요.”
돌이켜보면 영화 ‘검사외전’(2016)의 악덕 검사와 드라마 ‘브레인’(KBSㆍ2012)의 비열한 외과 과장 등 이성민이 연기한 악역들도 어딘가 코믹해서 마냥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갖고 있다”며 “근엄한 겉모습에 숨겨진 가벼움과 지질함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성민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스크린에선 엄청난 장악력을 보여 주지만, “집에서는 아무 존재감이 없다”면서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열여덟 살 딸을 야단치다가도 “언변이 달려서” 물러서고, 가족이 잠든 밤에 헤드셋을 쓰고 조용히 혼자 영화를 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란다. “중년 남자들은 다 이렇게 산다”며 이성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성민은 올여름 안에 영화 ‘공작’과 ‘목격자’ ‘마약왕’까지 출연작 세 편을 더 선보일 예정이다. 떠오르는 ‘다작배우’다. “재작년부터 찍은 영화예요. 우연히 개봉 시기가 겹쳤어요. 곧 새 작품을 결정하려고요. 영화 다 찍고 석 달째 쉬고 있는데, 가족들이 이제 그만 밖에 나가라고 하네요. 하하.”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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