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원 돈 들여 입찰 통과해도
프로젝트 일방적 취소 통보 예사
법정다툼 땐 수 년씩 걸리고
찍힐까 우려 억울해도 속앓이만
광고대행을 하는 T사에 다니는 임원 조모(46)씨는 요즘 대형마트나 백화점 유아용품 매장을 지날 때면 쓰린 속을 애써 달랜다. 한창 잘 나가는 유아용품 Z사의 한 상품 광고 문구가 매장마다 걸려 있는데, 거기에 남 모를 조씨의 억울한 사연이 담겨 있어서다.
조씨가 일하는 회사는 2016년 Z사가 진행한 제품 홍보·마케팅 공개입찰에 참여했다. 광고 문구와 홍보 전략을 마련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러한 노력 덕인지 기획안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광고 대행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Z사는 본계약을 앞두고 미적거렸다.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얼마 뒤에는 다른 광고대행사가 일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항의하러 찾아갔지만 “대행업체 선정 업무 담당자가 퇴사해서 기존에 정해진 업체도 바꾸기로 했다”는 말만 들었다. 조씨는 “기획안을 만들면서 들였던 시간과 비용이 한 순간에 날아가게 됐다”면서 “더 당황스러운 건 정작 그 제품 광고 문구 등이 우리가 냈던 아이디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광고나 제품 디자인 제작 등을 대행하는 중소업체들이 고객사 ‘갑(甲)질’에 눈물 흘리고 있다. 몇 주간 밤새워 프로젝트를 만들고, 수백만원 이상 돈을 들여 입찰이라는 경쟁을 간신히 통과해봐야 일방적인 프로젝트 취소를 당하기 일쑤다. 이렇게 중도 탈락한 업체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고객사가 마음대로 도용하지만, 대행사들은 별다른 대응을 못한 채 속앓이만 할 뿐이다.
T사처럼 고객사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는 예사다. 경쟁입찰에서 업무를 따내고도 ‘당신 업체랑 하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과정은 ‘없던 일’이 된다. 부당함을 따져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도 않는다. 디지털 콘텐츠 제작사 A사 역시 얼마 전 한 대기업으로부터 애플리케이션 제작 및 디자인 업무를 따냈는데, “새로운 아이디어 내봐라” 등 새로운 작업만을 요구 받다가 프로젝트 취소 통보를 받았다. 직원 십수명이 7개월간 매달린 일이었는데, 대기업 쪽에서는 프로젝트 계약 성사 이전이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억울한 건 아이디어 도용. ‘당신들과 일 안 하겠다’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이들이 제안한 각종 아이디어를 교묘하게 차용한다는 게 피해업체들 얘기다. 또 다른 광고대행사 A사 대표 고모(49)씨는 “다수 업체로부터 광고전략 프레젠테이션을 받은 뒤, 아이디어들을 조합해 광고를 만들기도 하고 가장 적은 금액을 써낸 업체를 선정하고는 다른 경쟁 업체 전략을 줘서 일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피해 업체들이 법적 조치를 고려해보다가도 금새 포기하는 게 대부분이다.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법정다툼에 뛰어들기가 어렵고, 워낙 도용이 교묘하게 이뤄져 법원에서 이를 인정 받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실제 T사 역시 Z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긴 했지만, 승소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홍보대행사 A사에서 일하는 직원 허모(36)씨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괜히 문제제기를 했다 고객사에 ‘찍힐까 봐’ 그냥 넘어가야 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황기석 한국디지털기업협회장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제안서를 요청할 때부터 프로젝트를 언제부터 시작할지, 대행 업무 범위는 어디까지 할지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도록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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