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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남편에 순종해야” 성경구절, 하나님 참 뜻일까

입력
2018.04.07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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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가느라 집안 일 소홀하면

포악한 남편들이

하나님 말씀을 비방할까봐

남편에게 더 잘해주라는 당부일뿐

바울의 편지인 디도서를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입맛대로 해석

해석자가 선한 마음으로 읽을 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어

미국 남침례교단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이들이 인종화합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미국 남침례교단은 한때 흑인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나, 지금은 어느 교단보다도 인종간의 화합에 앞장 선다.
미국 남침례교단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이들이 인종화합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미국 남침례교단은 한때 흑인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나, 지금은 어느 교단보다도 인종간의 화합에 앞장 선다.

너무 어린 때라 뭣도 모르면서도 해보겠다고 그만 나서버렸다. 며칠 뒤 나는 서울 이태원의 한 호텔 로비에서 일흔이 넘으신 미국의 마빈 존스 목사님을 만났다. 내가 고작 21살 때였다.

미국의 남침례교단과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오랫동안 ‘한미 전도대회’라는 연례행사를 해왔다. 미국 목사님들이 약 일주일간 한국에 와서 주로 작은 시골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하는 행사였다. 본래 이 일에 투입된 통역관이 있었는데 그만 펑크가 났고, 학교 동기가 내게 대신 해달라고 급히 부탁을 하였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보다 조금 더 혀를 잘 굴렸을 뿐이었고 20대 초반의 철없던 아이였을 뿐이었다. 다니던 신학교를 일주일간 공결할 수 있다는 것에 신이나 그만 일을 저지른 것이다. ‘콩글리쉬’를 장착하고 어설픈 통역을 했지만 존스 목사님은 그런 나를 너그럽게 품어 주셨다.

노예제 옹호에 쓰인 디도서

나의 철없는 행동도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잘 받아주셨는데, 한 번은 나의 꽤 무례한 질문에 그분이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남침례교단은 매우 성공적인 교단이며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지만, 그들 역사에 오점이 되는 난감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용인하였던 것이다. 면전에 두고 목사님의 교단은 왜 노예제를 옹호했냐며 질문을 했는데, 그만 그분이 얼굴이 붉어지신 것이다. 영어가 서툴러 매우 또박또박 천천히 질문을 했기에 더 직설적으로 들렸을 것 같다. 목사님은 내게 설명을 길고 장황하게 하셨는데 내 영어 실력으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성경을 펼치며 읽어주셨던 디도서의 구절이다. “종들을 가르치되, 모든 일에 주인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말대꾸를 하지 말고, 훔쳐내지 말고, 온전히 신실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낼 것입니다.” (디도서 2:9-10) 물론 존스 목사님이 이 구절을 가지고 노예제도를 옹호하진 않으셨다. 그러나 한때 노예제도를 옹호하던 자들은 이 구절을 즐겨 언급하며, 마치 성경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었다.

남성우월주의자도 인용하는 디도서

디도서는 바울이 자신의 제자였던 디도에게 전했던 편지다. 이 편지에는 노예제도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하여도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이 있다. “젊은 여자들을 훈련시켜서,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고, 순결하고,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질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2:4-5) 기독교 남성우월주자들이 즐겨 언급하는 구절이다.

디도서의 논란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대는 신도를 일깨워서, 통치자와 집권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또,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관용하게 하며,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3:1-2) 부패한 정권을 향해 항거하던 기독교인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자주 언급되었던 구절이다.

디도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정말 그런 책일까? 불우했던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밀었던 예수는 그렇다면 누구인가? 예언자의 가르침을 따라, 일제의 불의와 억압에 항거했던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 대표적으로 길선주, 이승훈, 유관순, 김구, 주기철, 김교신, 윤동주의 기도와 피땀은 헛짓이었던 것인가?

어떤 문구든 전체 문맥에서 똑 떼어내어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는 상식이다. 누구든 위 구절들을 디도서 전체에서 따로 떼어 읽으면 오해 할만하다. 바울의 제자 디도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디도서 첫 장에는, 크레타에서 일하는 제자를 향한 바울의 근심이 이렇게 적혀있다. 크레타 사람들은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디도서 1:10-11)

물론 지금의 크레타 주민들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평판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나돌았다.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1:12) 그래서 바울을 디도에게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여, 그들의 믿음을 건전하게 하고, 유대 사람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하라고 신신당부 하였다.(1:12-13)

책 잡히지 말라는 당부일뿐

위에 인용한 여성에 대한 구절을 다시 보면, 문장의 핵심은 후반부에 있다. 여자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게 하라는 것이 중요하다. 크레타 남자들이 꽤 포악했는데, 그들의 아내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선하다. 행여 밥이라도 늦게 챙겨주어 책잡히게 되면 아내들이 교회에 오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어지간히 교회와 신앙도 비방 받았을 것이다. 때문에 여자가 기독교인이 되면 남편에게 더 잘 해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도 신앙도 보호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해석은 엉터리다.

노예문제도 마찬가지다. 노예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 주인이 썩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혹 그들의 불성실한 행실이 보이면, 그 구실로 노예 자신도 교회와 신앙 전체도 비방 받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 종들은 예전보다 더 열심히 주인을 섬기어 자신도 보호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한 것이다. 국가권력 문제도 마찬가지로 해석하면 된다. 더 나아가 성서 전체를 통해 본다면, 기독교는 예수나 예언자들처럼 부패한 권력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옳다.

신약성서의 언어인 헬라어로 적힌 디도서 첫 장. 11세기.
신약성서의 언어인 헬라어로 적힌 디도서 첫 장. 11세기.

전체 맥락 속에서 성경 읽기

이 때문에 위에 문제가 되었던 구절들은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디도서 안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정신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서의 일부 구절들을 따로 떼내 폭력을 정당화하고 외국인을 차별하며 약자를 억압했던 이들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에 있었다. 사실 그들은 성서를 정당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다. 자기 집단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대체 예수님은 어디에다 버려놓고 그런 해석을 만들어 낸 것인지.

가장 올바르게 성서 해석을 이끄는 방법론이나 이론 같은 것은 없다. 어떤 방법론을 동원해도 해석하는 자의 심성이 악하면 악한 해석을 만들어 낸다. 올바른 성서 해석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해석자의 선한 영성이다. 하루 종일 성경을 읽는다고 혹은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올바른 성서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보다는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자기보다는 이웃을 이롭게 하기 위해 성서를 묵상하고, 자기보다는 이웃이 걱정되어 저녁 뉴스를 보는 신앙인이 올바른 성경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본질, 자애로운 해석

한미 전도대회를 잘 마치고 마빈 존스 목사님과 나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 하였다. 식사 후 드디어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나를 꼭 끌어 안으시며 내 귓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I’ll never forget you(널 잊지 않을 거야).” 너무 감사해서 나도 뭐라고 답을 해야 할 텐데, 또다시 영어가 꼬였다. 똑같은 말로 대답하기도 그렇고, “Me too(저도요)”라고 하기에는 성의가 없어 보이고, 엉겁결에 그만 실수로 이렇게 내뱉었다. “I’ll never remember you(난 당신을 기억도 안 할 겁니다).” 순간 포옹을 한 채 잠시 얼어붙었지만, 이내 서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존스 목사님은 심지어 나의 실언마저도 전체 문맥 속에서 ‘올바르게 해석’해 주셨다. 너그럽고 자애로운 그분의 ‘선한 마음’은 나의 진의를 놓치지 않으셨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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