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별세
미야자키 감독의 절친으로
스튜디오 지브리 공동 설립
“앨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주근깨에 빼빼 마른 빨강머리 소녀 앤이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는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삶의 진리가 녹아 있는 명대사로 기억되고 회자된다. 1980~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앤은 꿈과 용기를 심어 주는 소중한 친구였다.
앤이 초록 지붕 집 창틀에 턱을 괴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 바라보던 하늘 저편으로 큰 별이 졌다.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1979)의 아버지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감독이 지난 5일 일본 도쿄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83세.
애니메이션 영화 ‘반딧불이의 묘’(1988)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등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다카하타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계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거장이다.
도쿄대 불문과 재학 시절 안데르센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폴 그리모의 작품을 보고 애니메이션에 매료된 다카하타 감독은 대학 졸업 후 1959년 도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디뎠다. 5년간 조수 생활을 거쳐 1964년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감독 데뷔했다. 도에이 애니메이션에서 노조 활동을 하면서 만난 미야자키 감독과는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로 함께했다. 여러 작품에서 연출과 제작, 또는 연출과 프로듀서로 공동 작업한 두 사람은 1985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함께 설립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두에서 이끌어 왔다. 다카하타 감독은 물질문명에 비판적인 미야자키 감독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반딧불이의 묘’에선 전쟁 참상
‘폼포코…’선 환경 파괴 고발
국내서도 큰 인기 얻어
다카하타 감독의 작품은 1970년대 TV 애니메이션과 1980년대 이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그가 감독을 맡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 등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는 1980~1990년대 한국에서도 TV로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불멸의 명작 ‘미래소년 코난’(1978)의 일부 방영분을 연출하기도 했다. 미야자키 감독도 이 작품들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980년대 들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눈을 돌린 다카하타 감독은 스튜디오 지브리 창립 이후 ‘반딧불이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웃집 야마다군’(1999) 등을 내놓으며 명성을 쌓았다. 미야자키 감독과의 협업도 계속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등에서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다카하다 감독의 작품 세계는 미야자키 감독에 비해 일본색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러 작품에서 일본의 시대상과 생활 정서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특히 ‘반딧불이의 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전범국인 일본이 스스로 전쟁 피해자라 주장하는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영화 속 어린 남매가 겪는 고난은 수많은 관객을 울렸다.
20대 직장 여성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방문한 고향 시골마을에서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 ‘추억은 방울방울’과, 평범한 가정의 소박한 일상 풍경을 그린 ‘이웃집 야마다군’도 일본의 생활 정서를 사실감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삶의 보금자리인 숲을 지키려는 너구리들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그리면서 환경 파괴와 도시 개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 줬다. 이 작품은 일본 개봉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을 제치고 두 달여간 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애니메이션의 칸국제영화제’라 불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웃집 야마다군’ 이후 작품 활동을 멈춘 다카하타 감독은 2013년 ‘가구야공주 이야기’로 14년 만에 돌아왔다. 담백하고 깔끔한 작화와 수채화풍 영상, 히사이시 조의 신비로운 배경 음악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15년 제87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부문 후보로 올랐고, 지브리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그리고 다카하타 감독의 유작이 됐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오는 15일 다카하다 감독을 추모하는 장례 행사를 열 계획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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