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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관음송이 슬퍼 보이는 건 단종의 울음소리를 보고 들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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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관음송이 슬퍼 보이는 건 단종의 울음소리를 보고 들었기 때문”

입력
2018.04.06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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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씨

전국의 나무 찾아다니며 견문

나무를 노래한 옛시 75편에

식물ㆍ인문학ㆍ문학 등 지식 보태

자연과 삶의 이치를 풀어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마음산책 제공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마음산책 제공

시들어 떨어지는 꽃잎만큼 시심(詩心)을 돋우는 존재가 있을까. “작약 호화로운 꽃잎 다 떨어지자/바람결에 날리는 잎잎이 쓸쓸하네/벌 나비는 꽃 곱던 시절 차마 못 잊어/시든 꽃 찾아와 울음 울며 탄식하네”(김시습 ‘작약’). 김시습(1435~1493)의 작약이 시들고 600번 가까운 봄이 지나는 동안 작약은 지고 또 졌다. “빛깔 화려하고 덩치도 큰 꽃인 까닭에 시들고 지는 모습이 슬픔의 빛깔인 꽃, 피어날 때부터 시들어질 때를 근심하게 하는 꽃.” 고규홍(58)씨에게도 작약은 슬픈 그리움이다.

20년 가까이 나무 칼럼을 써 온 일간지 학술기자 출신의 나무 칼럼니스트, 나무 책을 30권 넘게 펴낸 나무 박사, 나무를 보고 또 보는 나무 대변인. 고씨의 직함을 굳이 정의하자면 그렇다. 여하튼 그는 꽃과 나무와 숲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또 다른 나무 책 ‘나무가 말하였네: 옛시’(마음산책)를 냈다. 나무를 노래한 옛시(漢詩) 75편을 식물학, 인문학 지식을 보태 요즘 말로 풀어 쓰고 감상을 덧붙였다.

저자는 딱 10년 전 나무로 현대시를 읽은 ‘나무가 말하였네 1, 2’를 냈다. 옛시로 건너온 사연은 뭘까. 책 머리말에 나와 있다. 저자는 만년필 수집가다. 만년필 잉크가 굳을 틈을 주지 않으려고 6,000편 넘는 옛시를 베껴 쓰기 시작한 게 책까지 이어졌다. 선친의 유산 127만원으로 만년필을 산 이야기는 뭉클하다. 책은 머리말부터 훅 들어온다. 잘 쓴 머리말은 좋은 책을 알아보는 믿음직한 기준이라고 했던가.

저자의 이력이 빛나는 건 이를테면 ‘괴(槐)’라는 한자를 풀이하는 대목에서다. 고려 말 학자 이곡의 시에 나오는 ‘괴’를 옥편은 홰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로 정의한다. 모두 다른 나무다. 근대 식물체계를 잘 정리하지 못한 탓에 뜻이 뒤섞였다. 저자는 시가 그린 풍광과 시에 어린 시인의 마음을 짐작해 회화나무라는 결론을 내린다. “(시에 적힌 대로) 솟을대문 앞에 자손의 출세와 번영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라면, 느티나무이기보다는 회화나무여야 맞지 싶다.”

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 지음

마음산책 발행∙288쪽∙1만3,500원

저자는 1999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녔다. 단종이 유배지인 강원 영월군 청령포에 심은 소나무 ‘관음송’, 고려 후기 승려 혜심이 전남 화순 만연사를 창건하며 심은 전나무, 개혁에 실패한 조광조의 추종 세력이 재기를 다짐하며 전남 나주시 송죽리에 심은 동백나무… 저자가 만나 본 옛시 속 나무들은 저자의 기억을 입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관음송은 단종의 울음소리를 보고 들었다는 뜻에서 뒷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줄기가 사람 키 높이쯤에서 둘로 갈라지면서 한쪽은 왕비가 남아 있는 한양 땅을 향해 비스듬히 뻗어올랐고, 다른 하나는 곧게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의 슬픔을 채 안아주지 못해 나무는 하늘로 하늘로 가지를 솟구쳐 올렸다. 억울한 영혼으로 단종이 쓰러진 뒤에도 나무는 청령포 한가운데 남아서, 그때 그 울음을 홀로 안고 슬프게 서 있다.”

매화를 좋아한 퇴계 이황의 유언이 “저 나무에 물 주거라”였다는 것, 그 매화가 이황이 홀아비 시절 관기에게 받은 매화였다는 것, 경남 산청군 단속사터에 남아 있는 ‘정당매’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라는 것… 저자의 나무 이야기 보따리는 깊고 깊어서, 매화 하나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교과서는 덮어 두고 시를, 자연을 즐기라고 말하는 낭만파 문학 선생님을 닮았다.

저자는 나무를 친구로 삼고도 책 곳곳에서 외로워한다. “아스라이 봄날의 풍경이/비바람 따라 무르익었다 사라진다”(송한필 ‘봄날은 간다’). “달빛 아래 오동나무 잎 다 지고/들국화 서리 맞고 노랗게 피었다/(…) 밝아오는 아침에 임 떠나보내면/사무치는 그리움 물결처럼 끝없으리”(황진이 ‘마지막 오동잎 지고’). 시를 읽으며, 계절을 떠나보내며, “삶과 죽음이 하릴없이 거쳐야 할 생명의 굴레”라고 쓸쓸해한다. 이순을 앞둔 때문일까. 5일 전화로 만난 그는 “오랫동안 혼자 다녀서 그렇다. 외로움엔 면역이 없다고 하지 않나. 나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며 웃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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