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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단층대 위에서의 조정자 외교

입력
2018.04.04 15:1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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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대 위에 있다. 과거 미소 사이에 형성된 냉전구도는 미중 대립이라는 강대국 간 판의 충돌로 옮겨가고 있다. 그 위에서 한반도 문제는 남북 당사국의 문제인 동시에 국제질서의 대립선상에 놓여있다. 한중과 한일, 그리고 중일 갈등과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도 크고 작은 단층선을 추가로 형성한다. 복합적 단층대 위에서 강대국들을 상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의 무게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지정학적 단층대 위에서는 종종 강한 자기장이 발생한다. 냉전 시기의 대립구도로의 회귀 본능이 관련국 사이에 남아있고, 이는 가장 손쉬운 제로섬 게임의 균형점을 찾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재회는 필연적 수순이다. 한반도 문제를 축으로 미국과 중국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미국과 중국 두 판의 움직임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종속변수로 움직인다.

북의 대화 선회는 자발적 입장 변화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구멍 뚫린 제재가 아니라 실질적 제재 효과가 작용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든 핵ㆍ미사일 프로그램을 가장 좋은 조건으로 정산할 수 있는 출구전략의 시기가 되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북핵 문제의 직접적 당사국이자 잠재적 피해국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에 대한 효율적 억제력을 갖지 못했다. 군사ㆍ경제적으로나 체제보장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한국이 독자적으로 제공할 카드가 별로 없어 미국 중국처럼 실질적 억제력에 기반한 대북 전략을 갖기 어렵다. 한국은 대화의 틀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었고 북핵 해결의 전개 양상을 변환시켰지만 궁극적 협상의 내용과 조건을 주도할 수단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조정자라는 역할은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옵션이다.

조정자의 역할이 모든 관련자들과 등거리를 유지하는 상황에서는 ‘마이너스의 균형’이 발생하기 쉽다. 상대방이 서로 딜레마 상황에 처하게 하면서 상호견제를 유도하고, 이 과정 속에서 중립적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반도 상황을 진전시키는 게 저비용의 멋진 외교전략이다. 하지만 고립무원 상태에서 강대국 사이의 ‘코리아 패싱’이 발생할 수 있고, 고유의 억제력이 없어 무력한 조정자로 격하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실효적 대북 억제력의 확보를 바탕으로 한 협상 전략이다. 생존과 이익을 담보로 한 협상에서 순수한 대화와 선의는 힘을 얻기가 어렵다. 대화라는 기제는 평화적이고 자유적이지만, 대화와 협상의 내용은 힘과 이익을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외형과 내면이 혼재되어서는 안된다. 비핵화의 목표를 위해서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한 대북 억제력의 확보는 필요조건이 되고, 단층대 위에서 휩쓸리지 않을 발판이 된다.

중장기적으로는 역내 제로섬 성격의 균형을 상호이익의 포지티브 섬 게임으로 전환시킬 기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 일본과 실질적 이해관계를 연계시킬 경제, 물류, 에너지 등의 구체적인 제안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한·중·일 및 소다자주의를 연계시키는 방안도 이에 포함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하지만, 동시에 한국이 제안하는 디테일은 동북아 지정학의 단층대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된다.

남북한 합동 공연과 문화교류의 추진은 새로운 기대와 감동을 주었다. 엄중한 대립 상황 앞에서 정서와 낭만을 공유하는 것이 순진한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한민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대에서 버텨낼 수 있는 냉철한 협상전략과 경제적 상호의존의 안전판 마련이 더더욱 필요해진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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