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문당하며 ‘4ㆍ3은 진행 중’ 느껴
4ㆍ3, 제주 넘어 국가ㆍ세계의 비극
70년 지났어도 한국史서 배제
세계에 알리고 온당한 평가를
진짜 가해자인 군ㆍ경찰 사과해야
“희생자 2만5,000~3만명 추정(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 10세 이하 어린이 814명, 61세 이상 노인 860명, 여성 2,985명 희생. 군경이 쫓는 도피자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자행. 군의 대량학살계획에 따라 주민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 45곳. 가옥 3만9,285채 소각…”
정부가 2003년 발표한 ‘제주 4ㆍ3 진상조사보고서’의 기록이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좌익과 우익이 싸우는 사이에 국가 공권력에 제주 주민이 대거 희생당한 사건’으로 요약되는 제주 4ㆍ3.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건’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비극.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 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제주 4ㆍ3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 ‘순이 삼촌’(1978)의 문장이다. 소설은 주민 400명이 총살당한 제주 조천읍 북촌리 학살의 생존자 이야기다. 제주 태생 소설가 현기영(77)은 문예지 ‘창비’에 소설을 내 참극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가 바란 슬픔의 진상규명은 속도가 더뎠다. ‘순이 삼촌의 그 작가’로 40년을 산 현 작가를 2일 전화로 만났다. 3일 제주에선 제주 4ㆍ3 70주년을 맞아 희생자 추념식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40년간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나.
“격세지감이다. 2000년 ‘제주 4ㆍ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했다. 비극을 은폐하려는 불의와 맞서 싸운 젊은이들 덕분에 4ㆍ3이 음지에서 양지로 겨우 나왔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까진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한국 역사에서 배제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다. 4ㆍ3을 역사의 올바른 자리에 세워 두려는 몸부림이다.”
-어떤 점이 미흡한가.
“4ㆍ3은 제주의 사건이 아니다. 육지에서 온 군경이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국가의 사건이다. 미군이 개입했으므로 세계의 사건이다. 세계에 비극을 알려야 한다. 군과 경찰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 미국 정부도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희생자들의 원한이 풀릴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한 적폐 청산, 즉 사회 정화의 물결을 타고 4ㆍ3이 온당하게 평가되기 바란다.”
-4ㆍ3에 대한 ‘기억 운동’을 하자고 한 뜻은 뭔가.
“기억을 보관한 것이 기록이라고 할 때, 4ㆍ3의 기록은 제대로 작성, 보존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기억을 틀어막은 탓이다. 기억은 생존자들의 뇌에 남아 있다. 뇌가 아카이브다. 그 역사적 기억을 회복해 세상 밖으로 내보내자는 것이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터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그러면 홀로코스트가 다시 일어나고 말 것이다’는 취지의 글이 써 있다고 한다. 4ㆍ3을 대입해 보라. 4ㆍ3 민간인 학살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이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끊임 없이 기억하고 재기억해야 한다.”
-제주도민들의 상처는 언제쯤 치유될까.
“눈앞에서 내 부모형제를 죽인 가해자와 생존자가 한마을에 사는 곳이 제주다. 언젠가는 화해해야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제주도민은 성인(聖人)들이 아니다. 실은 모두가 역사의 가혹한 수레바퀴에 치인 희생자다. 가해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 이웃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진짜 가해자는 국가와 당시 군경 수뇌부다.”
-‘순이 삼촌’으로 4ㆍ3을 불러낸 지 40년째다. 문학이 더 할 일은 뭔가.
“4ㆍ3은 언어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함이다. 4ㆍ3이 문학이 되기 어려운 이유다. 문학 속 슬픔은 독자가 견딜 만한 것이어야 하는데, 4ㆍ3의 슬픔은 그렇지 않다.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읽다 기절한 독자가 많았다. 나는 수많은 순이 삼촌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무당이었다. 요즘 작가들이 그런 일을 해 주기 바란다. 그들이 일상의 정서만 쓰려 하니 아쉽다. ‘4ㆍ3은 진행 중이구나, 내가 4ㆍ3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겠구나.’ 당시 고문당하며 든 생각이다. 나를 고문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도 권력의 도구일 뿐이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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