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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자주부강한 입헌공화국 건설” 일제에 맞선 시민적 민족주의

입력
2018.04.02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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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역사가 중 제1인자

“역사는 我와 非我 투쟁의 기록”

고대사, 한반도서 만주로 확장

실증 바탕한 근대 역사학 확립

#그의 삶ㆍ사상 지탱한 민족주의

일제 강점기 지식인 최선의 선택

테러 기반한 직접행동 제시하며

마지막엔 무정부주의자로 변모

#신채호 통해 본 오늘날 지식인

집합지성 등장ㆍAI 발전하면서

전문지식 독점적 소유 해체시켜

권력 비판ㆍ대안 제시 고민할 때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 학문과 정치는 넘나든 종합적 지식인 단재에게서 지식인의 미래를 읽어내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 학문과 정치는 넘나든 종합적 지식인 단재에게서 지식인의 미래를 읽어내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00년 동안 우리나라 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먼 길을 걸어갔던 이는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단재 신채호(1880~1936)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채호의 정체성은 여럿이었다. 언론인, 독립운동가, 역사가였고,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민족 해방에 헌신했고, 역사가로 진리 탐구를 추구했다.

신채호의 사상은 전통 유학에서 출발해 애국계몽사상과 민족주의를 거쳐 무정부주의까지 나아갔다. 이런 사상적 모험은 근대 초기에 활동한 지식인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멀고도 드라마틱한 경로였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역사학자 안재홍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천성의 준열함과 안식(眼識)의 예리함은 시속(時俗)의 무리들이 따를 수 없었던 바였고, 사상의 고매함은 스스로 세속에서 한 걸음 벗어났던 바”였던 지식인이 신채호였다.

지난 100년의 지성사에서 주목하는 신채호의 정체성은 역사학자다. 신채호는 박은식, 정인보, 백남운, 이병도 등과 함께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세웠다. ‘독사신론’(1908)을 통해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그는 1931~32년 조선일보에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해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을 수립했다. ‘조선사’는 1948년에 안재홍이 서문을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출간됐다. 당대에 활동했던 역사학자 정인보는 신채호를 ‘우리나라 사가(史家)들 중 제1인자’라고 고평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며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란 세계의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란 조선 민족의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너무도 유명한 ‘조선상고사’의 첫 구절이다. 신채호에게 역사란 ‘아’인 조선 민족과 ‘비아’인 다른 민족 간 투쟁의 기록이다. 그는 순정한 민족주의자였다. 사회학자 신용하가 주목하듯, 역사를 ‘민족적인 것’과 ‘비민족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사대적인 것’, ‘고유한 것’과 ‘외래적인 것’, ‘혁신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 간의 투쟁으로 파악한 것은 신채호 민족주의 역사관의 중추를 이룬다.

‘조선상고사’는 11편으로 이뤄져 있다.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 시대, 제3편 삼조선의 분립 시대, 제4편 열국 쟁웅 시대(대 한족 격전시대), 제5편 (1)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5편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구려ㆍ백제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9편 고구려의 대 수(隨) 전쟁, 제10편 고구려의 대 당(唐) 전쟁,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로 구성돼 있다.

이만열 선생이 근대 역사학자로 단재를 재조명한 '주석 조선상고사' 상하권.
이만열 선생이 근대 역사학자로 단재를 재조명한 '주석 조선상고사' 상하권.

‘조선상고사’의 일차적인 기여는 고대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만주로 확장해 우리 역사의 인식체계를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신채호는 고대사를 신라 중심 역사에서 고구려 중심 역사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그가 강력하게 비판한 역사가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었다. 그는 고려시대 묘청의 난을 ‘조선의 역사 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이 사건은 북벌파가 사대파에 의해 좌절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더하여, 신채호는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구사했다. 그는 역사를 모순관계의 상극투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과정으로 봤다. 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그는 사료 수집의 선택과 그에 대한 비판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실증적 방법에 주목해 역사학자 이만열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통해 한국 근대 역사학을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조선상고사’에 대한 토론은 엇갈린다. 재야 역사가들은 ‘조선상고사’의 견해를 크게 수용한 반면, 아카데미 역사학자들은 ‘조선상고사’의 견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왔다.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강조 또한 신채호의 역사 인식이 갖는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어떤 담론을 평가할 때 그것이 놓인 역사적ㆍ사회적 자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돼온 현재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담론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당대의 컨텍스트를 고려하면 민족주의 담론은 민족독립을 염원하는 지식인들에겐 당연한,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삶과 사상을 지탱한 가장 중요한 이념은 민족주의다. 그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권리를 보호하는 민족국가를 중시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을 쟁취해 자주부강한 입헌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신채호의 민족주의를 신용하는 ‘시민적 민족주의’라고 명명했다. 3ㆍ1운동 이후 지난 100년이 민주공화국을 향한 100년이었다면, 민족국가의 자율성과 입헌공화제를 열망했던 신채호의 민족주의가 갖는 역사적ㆍ사상적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신채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념이 무정부주의였다는 점이다. 그는 외교론ㆍ준비론을 주장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론을 비판한 동시에 문화운동론을 주장한 국내의 실력양성론 또한 거부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테러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론이었다. 이렇듯 신채호는 민족주의에서 민중직접혁명을 내세운 무정부주의로 나아갔다.

1923년 단재가 집필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단재의 독립운동노선은 직접행동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23년 단재가 집필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단재의 독립운동노선은 직접행동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런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역사학자 이호룡이 지적하듯,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용하가 지적하듯, 민족 독립을 위해 제시된 혁명적 민족주의로도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수단이 어떠하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은 신채호 사상의 처음이자 끝이었다는 점이다.

신채호는 작가이기도 했다. 항일의식을 고취한 소설 ‘꿈하늘’에서 그는 말했다. “내가 살면 대적(大敵)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또, 그는 평소 “생전에 조국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

충북 청주시 낭성면에 만들어진 단재 사당 내 단재 묘소. 가족은 단재의 유골을 국내로 들여와 묻었다. 문화재청 제공
충북 청주시 낭성면에 만들어진 단재 사당 내 단재 묘소. 가족은 단재의 유골을 국내로 들여와 묻었다. 문화재청 제공

1930년 신채호는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안재홍의 말처럼 준열하면서도 예리하고 고매했던 그는 1936년 이국 땅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그의 말대로 화장됐다. 그리고 유골로 국내에 들어와 어릴 적 살았던 고드미마을에 안장됐다.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80년에는 무덤 앞에 영당이 세워졌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마을. 민족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다.

지식인의 현재와 미래

신채호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정체성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했던 셈이다. 이 이론과 실천을 지탱한 이념은 민족주의였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지식인의 현재와 미래다(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김구의 ‘백범일지’를 다룰 때 살펴보려고 한다).

신채호는 언론인, 역사학자, 작가로 활동한 종합적 지식인이었다. 종합적 지식인은 전통사회 선비의 상과 잇닿아 있다. 선비는 학문과 정치를 넘나든 존재였다. 서구 전통에서 종합적 지식인은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다.

대전 어남동 단재 신채호의 생가. 문화재청 제공
대전 어남동 단재 신채호의 생가. 문화재청 제공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지식인의 모습은 광복 이후 종합적 지식인과 전문적 지식인, 아카데미 지식인과 앙가주망 지식인, 관료형 지식인과 참여형 지식인으로 분화됐다. 지식인 다수는 대학 안에서 전문적 지식인이자 아카데미 지식인으로 활동했지만, ‘서강학파’처럼 산업화 과정에 직접 개입한 지식인들도 있었고, ‘민교협(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처럼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이 자기 전공 분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진리 탐구에 주력하는 분야에선 권력 비판이 중요하다면, 정책 개발에 주력하는 분야에선 대안 제시가 중요하다. 하나의 잣대만으로 지식인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게 현재 지식인이 놓인 자리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은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집합지성의 등장은 그 동안 지식인이 누려왔던 전문지식의 독점적 소유를 해체시키고 있다. 더하여,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이 경향을 더욱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중의 도전에 맞서서 권력 비판과 대안 제시라는 본래의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지식인의 미래에서 점점 더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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