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늦은 밤, ‘폐기 직전’의 편의점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 안에 차갑게 얼어붙은 반찬들. 데워도 데워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딱딱히 굳은 밥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푹 찍어 한 입, 그런데 맛이 좀 이상하다. 황급히 뱉어내자 다시 허기가 서럽게 밀려온다. ”왜 돌아온거야?”라고 묻는 친구의 말에 혜원(김태리 役)은 짧은 회상을 마치고 대답한다. “배고파서.”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
# 허락된 식비는 하루에 단돈 4,000원. 그에겐 편의점 도시락조차 하루 중 가장 호화로운 한 끼다. 아침은 최대한 늦게 먹고, 점심은 굶는다. 저녁은 돼야 밥다운 밥을 먹는다. 남들처럼 다이어트한답시고 하는 ‘하루 두 끼’가 아니다. 돈이 없어서 선택권도 없는 ‘강제 하루 두 끼’다. 매일 접시를 닦고 무거운 쟁반을 들어 올리며 피자, 파스타, 스테이크의 냄새를 맡는다. 매일같이 나르는 음식들이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다. 김민영(27)씨에게 ‘밥상’이 간절했던 이유도 영화 속 혜원과 비슷했다. “배고파서.”
개봉 한 달 차, 148만 명의 관객이 ‘리틀 포레스트’에 다녀갔다. 스토리는 사실 흥행 영화 치고는 꽤 심심하다. 취업도, 연애도, 하다못해 한 끼 해결조차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젊은이의 이야기다.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스스로를 위해 건강한 밥상을 차려낸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 그래서일까. 극장을 나설 때면 ‘내 몸에 미안하지 않은, 정성껏 차린 한 끼’가 간절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상경한 혜원이 자리를 잡은 식당 ‘소녀방앗간’은 바로 그런 끼니를 차려내는 공간이다.
올해 겨우 스물일곱, 방앗간 주인을 자처하기엔 너무 ‘소녀’인 김민영씨의 이야기는 영화 속 혜원과 신기하리만치 꼭 닮아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혼자 먹을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단짠(달고 짠맛)’으로 버무린 바깥 음식은 화려하지만 탁하고, 너무 비싸요. 가볍게 낼 수 있는 돈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제대로 된 집밥 한 상을 차리고 싶었어요. 우리 산과 들에서 나는 우리의 재료로요.” 과연 그의 말대로 산나물밥이 든 뚝배기의 뚜껑을 열자 경북 청송 오지 마을에서 캐낸 다래순의 향이 훅 끼쳤다. 그가 말하는 ‘위로가 되는 밥상’이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어 졌다.
달래지지 않는 긴 허기, 청춘은 배고팠다
한창 먹어도 먹어도 부족할 나이. '잘 갖춰진 끼니'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이었다. “제가 살던 임대아파트는 일반아파트와 놀이터를 사이에 두고 같은 단지 내에 있었어요. 하루는 저 쪽에서 그 놀이터 입구를 막아버린 거예요. 집값 떨어진다고. 나중에는 철조망까지 쳐 버리더라고요.” 이 때 알았다. 사실 허기는 초라한 끼니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에 합격한 열아홉 살, 호기롭게 ‘경제적 자립’을 선언했지만 집 밖을 나와서도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못해도 70~80만 원은 벌어야 하니까. 오전엔 카페, 오후엔 과외, 밤엔 고깃집, 주말엔 뷔페에서 풀타임. 외식업 쪽은 종류 불문 안 해 본 게 없는데 단 한 번도 거기 메뉴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요. 잔반을 해치우는 식이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비참한 식사’는 강남의 유명 명품 백화점 식품관에서 고등어 굽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지하 1층 식품 코너 아래에 30평 정도의 작은 휴게실이 있었어요. 점심 피크타임이 끝나면 백 명이 훌쩍 넘는 직원들이 다 몰렸죠. 소위 ‘짬’ 없는 저 같은 사람은 앉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면 박스를 깔고 누웠어요. 거기 구겨져서 싸온 밥을 먹었지요. 눈치 보면서 꾸역꾸역.” 도시락이래 봤자 고시원에서 얻은 공짜 밥에 공짜 김치, 그 위에 김자반. 그렇게 한 끼 5,000원을 아꼈다. “그런 밥을 먹으면 내 인생도 초라해지는 것 같았어요. 밥상 앞에라도 평등할 순 없을까? 고민이 시작됐죠.” 잘 먹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이 스물넷에 처음으로 느낀 ‘맛의 위로’
대한민국 어디에든 있다는 빵집 프랜차이즈도 이곳까지 정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경상북도 청송 얘기다. 이 곳에서 민영씨는 처음으로 ‘인생 식사’를 했다. “미친 듯이 알바만 하다가 겨우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잘렸어요. 전화로. 지친 심신을 쉬게 하려고 아는 언니네 시골에 놀러 갔는데, 거기 어르신들이 내주신 밥이 그렇게 눈물 나게 맛있더라고요.” 커다란 대접에 아무렇게나 담긴 이름 모를 산나물들, 대충 볶아 낸 돼지고기, 시골 된장을 풀어낸 국 한 사발, 거기에 아낌없이 푼 고봉밥까지. 도시의 모든 것이 열 박자는 느리게 들어오는 ‘깡 시골’의 한끼는 자연의 맛 그대로였다.
“꼼꼼히 들여다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농촌 판타지’하곤 거리가 멀었어요. 농촌엔 농촌만의 언어가 있는데 유통업자들은 도시의 언어로 모든 걸 재단하려고 했죠. ‘된장 몇 ㎏에 얼마 줄 거냐’ 여기 된장은 10년도 더 된 귀한 자연 발효품인데 공장에서 억지로 발효시킨 화학식 된장과 숫자로 비교하다니요.” 생산자는 ‘절대을’, 유통업자는 ‘절대갑’이다 보니 좋은 작물이 속된 말로 ‘똥값’에 팔렸다. 알고 보니 민영씨의 아는 언니는 이런 오지 농촌의 질 좋은 작물들을 찾아내 생산자에게 제값을 주고 유통하는 젊은 일꾼이었다. 바로 ‘생생농업유통’의 청년창업가 김가영(32)씨. “도시에선 돈을 투자해서 또 돈을 벌죠. 농촌에선 땅이라는 자연에 사람의 땀을 투자해요. 언니가 하는 그 일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맑은 과정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당연했다.
외식업 회사에서 홍보인턴으로 일한 2년의 경력이 쏠쏠하게 도움이 됐다. ‘소비자한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았다. 농촌의 참 맛을 알리는 전달자 역할을 자처했다. “먹어보면 이 재료가 좋은지 다들 알지 않을까? 돈이 있건 없건 끼니는 늘 팍팍하게 먹는 도시 사람들에게 이 맛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가영씨는 ‘다 잃어도 괜찮으니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2014년 ‘소녀 방앗간’ 1호점이 서울숲 앞에 문을 열었다.
‘단짠’은 없고, 내 몸에 미안하지 않은 맛은 있다
“보통은 어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구하잖아요. 여기는 반대예요. 좋은 재료가 있으면 그걸로 어떤 음식을 만들지를 정해요.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우리의 시그니처 메뉴 ‘산나물밥’이죠.”
늘 같은 나물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요즘 같은 춘삼월엔 다래순이 들어간다. 철 따라 어수리가, 뽕잎이 들어가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대로 그때그때 땅에서 나는 것들을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 “작년엔 무가 풍년이어서 한 어르신이 무말랭이를 한 아름 해서 올리셨더라고요. 오징어 넣고 젓갈로 만들어서 오래오래 반찬으로 내고 있죠.” 기본으로 나오는 된장국은 멸치육수에 된장 넣고 팔팔 끓인 게 다다. 청송에서 먹은 그 맛, 재료 본연의 ‘그 맛’을 살리기 위해서다.
‘방위순 할머니 간장, 장순분 어르신 들기름, 황태한 어르신 고춧가루.’ 메뉴에는 재료를 주신 어르신들의 성함이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힌다. “산나물은 너무 푹 삶으면 다 부서져서 씹는 맛이 없응께, 딱 야들야들할 때 건져줘야혀!” 레시피에도 어르신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조미료 하나 없이 염도 0.7 이하로 유지하는 밥맛엔 ‘단짠’이 없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누군가는 말했다. “외식업의 1도 모르는 게! 이런 걸 누가 먹어?” 그럼에도 굴하지 않았다. “내 몸에 미안하지 않은 시골의 순한 맛을 전하는 게 우리의 목표였으니까요.” 함흥냉면만 찾다가도 때론 심심한 평양냉면 생각이 간절해지듯, 소녀방앗간의 음식도 시간이 갈수록 마니아가 늘었다.
관광버스 타고 올라와 자신의 이름 석자가 박힌 메뉴를 직접 먹어본 어르신들은 물었다. “시상에, 이런 시골식을 도시청년들도 좋아한담?” “그럼요, 어르신!” 성수 맘카페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소녀방앗간은 ‘이유식 뗀 우리 아이 첫 된장’을 먹이는 착한 식당이 됐다. 창업 3년 반째, 어느덧 서울 점포가 6곳이다.
방앗간의 소녀들에겐 ‘한 푼 더 벌려고 욕심 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열다섯, 집값 떨어진다고 애들 노는 놀이터에 철조망을 올리는 어른들을 봤다. 스무 살, 생선 냄새 밴 작업복 차림으로 명품관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일갈을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허기질까’ 고민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돈 한 푼에 팍팍해지지 말자. 내 마음이 각박한데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위로가 나올 수 있겠나.’ 그래서 소비자에게 합리적 가격을 받고 생산자에겐 제 값을 준다. “제가 아르바이트 할 때 식당밥 못 먹던 게 한이 돼서, 우리 직원들은 매일 우리 식당밥을 먹여요. 브레이크 타임은 성수동에서 제일 처음 시작했어요. 칼같이 오후 3시~5시. 어려서 험하게 고생한 게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니까요.” (웃음)
위로받고 싶어서, 위로를 건넸다
“제가 입덧으로 밥을 못 먹었는데 아침부터 소녀방앗간 생각이 나서 9시부터 서울숲에서 기다렸다가 들렀습니다. 10일 만에 밥을 먹은 것 같아요.” -2017.10.17 세 아이 맘-
작년 10월, 단골 임산부 손님이 냅킨에 수줍은 감사를 적어 건넸다. ‘소녀방앗간’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꼬마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이 특히 많다. 탄산음료 대신 발효사과청으로 만든 스파클링 주스를 손에 들려준다. 민영씨 눈엔 산골 할매가 만든 발효청이 세 살배기 아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혼밥’하러 오는 젊은 회사원들도 많다. “이 근처에서 혼자 자취하는데, 여기 밥을 먹으면 꼭 집에 온 것 같아요.” 한 때 ‘따뜻한 밥’으로 위로받고 싶었던 젊은이가 이젠 위로를 건넨다. “저처럼 늘 허기졌던 사람들에게 정성껏 한 상을 차려주고 싶었는데 소원 이뤘죠.”
마지막으로 인터뷰 내내 마른 목을 축여주었던 차의 이름을 물었다. 산나물밥에도 들어가는 ‘다래순차’란다. “지금은 봄이라 미지근한 다래순차를 내요. 여름엔 어수리차를 차갑게 해서, 겨울엔 뽕잎차를 뜨겁게 팔팔 끓여서 드리고요.” 무릎을 탁 친다. 물 한잔에도 ‘위로’의 철학이, 이토록 진지한 정성이 담겨있다니.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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