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가 미국이 러 외교관 60명을 추방한지 3일 만에 동일한 숫자의 미국 외교관을 쫓아냈다. 자국 주재 유럽연합(EU) 국가 외교관들도 무더기 추방했다. 냉전 시대 이후 이처럼 대규모의 외교관 추방 사태가 벌어진 것은 처음이다. 영국에서 벌어진 전직 러시아 이중스파이 부녀 독살 기도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 러시아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신 냉전 시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29일(현지시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 외교관 60명을 추방하는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미국 영사관도 폐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존 헌츠먼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도 초치해 경고했다.
‘상호주의에 따른 거울(mirror) 조치’라는 설명대로, 미국에서 추방당한 자국 외교관 규모만큼 숫자를 꼭 맞췄고, 미국의 시애틀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 폐쇄도 똑같이 되갚아줬다. 러시아는 앞서 영국이 자국 내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했을 때도, 23명의 영국 외교관을 내보내는 것으로 맞불을 놨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며 미국과 영국이 반(反) 러시아 정책을 고수할 경우, 추가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독일 4명, 체코 3명, 폴란드 4명, 스웨덴 1명 등 EU국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미국은 강경한 입장이다. 미국은 이번 조치가 미러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짚으며, 추가 대응을 시사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러시아의 결정은 미러 관계가 더 악화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며 “러시아의 반응은 예상됐던 일로, 미국도 이에 대처해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은 “러시아 정부가 외교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유감스럽고 부적절한 결정이다”며 “러시아는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추가 조치와 관련해서, 헌츠먼 대사는 러시아의 해외 자산 문제를 다룰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영국도 대러 추가 보복 움직임을 보였다. 영국 내 러시아 부호 700여명의 ‘티어1 비자(최소 200만 파운드를 투자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 대상)’를 재검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불법으로 조성된 자금인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으로,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 조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가 일촉즉발의 대립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마이클 콕스 런던정경대 국제관계학 명예교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유럽연합(EU)의 경제적 관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는 과거의 소비에트가 아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는 유럽 전체와의 싸움을 우려해, 런던과 워싱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이 중상모략으로 동맹국들을 반(反)러시아 전선으로 몰아넣고 있다면서도, 외교관 추방 조치에 가세했던 독일 프랑스 등 나머지 국가에 대해선 비난을 자제했다.
한편 독극물 공격을 받았던 세르게이 스크리팔의 딸 율리아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의식이 회복되고 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러시아도 내달 4일 진상 규명을 하겠다며, 유엔 화학무기금지기구(OPWC) 회의를 열어줄 것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이 또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긴장이 고조되면 통제 불능이었던 냉전시대와 지금은 다르다”며 “상황 악화를 막는 소통 기제와 예방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서방과 러시아 양측에 대화를 통한 해법을 촉구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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