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위로를 받으면 가슴이 조여든다. 상처 난 딱 그 자리를 알고 건드리는 위로가 그렇다. 문정희(71) 시인의 새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은 그런 위로다. “눈물에서 태어난 보석”, 딸들을 품는 위로. “맞아요. 위로하려고 썼어요. 왜 갑자기 눈물이 나죠?” 29일 전화로 만난 문 시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1969년 등단한 문 시인은 ‘도발하는 여성의 시’를 써 왔다. “남성에 길들여진 언어로는 시를 쓰고 싶지 않아요. 아름다운 것만 쓰는 건 시가 아니에요.” “유난히 짝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는/어디에나 있는 여류시인이 싫어/자기 외에는 못 보는 시인이 싫어”(‘줄광대’ 부분) 꽃으로, 명예 남성으로 사는 이들을 향한 시원한 일갈.
힘내 싸우자는 선동의 말은 힘이 세지 않다는 걸 문 시인은 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없이 피투성이가 돼 본 자신의 이야기, 페기 구겐하임부터 간첩 김수임까지, 세상의 전복을 시도한 여성들의 이야기. 53편이 실린 시집은 통째로 하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1, 2, 3부 식으로 나누어 편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51번째 시, ‘곡시(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에서 폭발한다. 천재 작가 김명순(1896~1951(?))은 일본 유학 중 “데이트 강간”을 당했다. “탕녀”로 찍힌 그는 문단에서 매장되고 정신병원에서 혼자 죽었다. 문 시인은 비틀기로 만족하지 않는다. 직설하고 직격한다. 성폭행범인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 이응준”과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 “염상섭” “방정환”을 비롯한 당시 문단의 2차 가해자들을 까발린다.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자신을 ‘시인’이 아닌 ‘전사’로 만든, ‘남근의 부당한 지배’를 고발한다.
“술 취해 잠자는 남편의 성기를 자른 후/경찰에 신고한 그녀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나는 남편의 성기를 자르지 않았어요/내가 자른 것은 치욕과 학대와 모멸입니다/태어날 때 우연히 달고 나온 것 하나로/그가 행사한 폭력과 야만/내가 자른 것은 그의 짐승입니다//(…) 나는 나의 무지를 자르고/처음으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자백’ 부분)
작가의 사랑
문정희 지음
민음사 발행∙144쪽∙9,000원
이어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을 비웃는다. “비겁한 계산으로 온 힘을 다했지만/실상 내 안에는 벌써 과부가 된 땅이 있는 것/(…) 아침에 먹은 국그릇에 남은 얼룩처럼/그사이 맛도 향기도 식어/습관만으로 무사한/빈 수레를 운명이라 이름할 수는 없어요”(‘졸혼(卒婚)’ 부분) 여성 투사의 시가 전부는 아니다. 등단 반백년을 앞둔 원로 시인이 여전히 시가 고프다고 토로할 때, 읽는 이는 숙연해진다. “나의 옷은 허사(虛辭)로 쉬이 낡아갔다/오직 나만의 슬픔과 기쁨으로 짠 피륙은 없을까/나의 시(詩)옷은/수의(囚衣)와 수의(壽衣)를 속에 껴입고도/언제나 홀랑 추운 알몸일까”(‘나의 옷’ 부분)
문 시인은 표제작 ‘작가의 사랑’을 직접 골랐다. “내가 불쑥 말했어/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우리는 팬티를 벗었어/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이토록 야하지 않은 “팬티”는 문 시인만 쓸 수 있는 관능의 시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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