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승용차는 현대자동차의 신형 그랜저다. 엔진 종류와 옵션 수준에 따라 세부 모델이 10여 종이 넘는 그랜저는 총 13만2,080대 팔렸다.
그럼 같은 기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TV는 어떤 브랜드의 어떤 제품일까.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을 못한다. 집계가 되지 않아 통계가 없는 탓이다. 제조사야 당연히 모델별 판매량을 정확히 알겠지만, 국내에서 가전산업이 태동한 이래 제조사가 연간 판매량을 구체적으로 공개한 적은 없다.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와 제품은 물론이고 국내에서 1년간 TV가 총 몇 대나 판매됐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TV가 당연히 국내에서도 1, 2위를 했을 것이다.
TV만의 얘기는 아니다.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웬만하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 가전제품들과 전 국민이 거의 다 들고 다니는 휴대폰 판매량도 공식적으로 집계ㆍ발표된 적이 없다. 대개는 ‘업계 발’이란 꼬리표가 붙는 연간 시장 규모 추정치 정도가 소비자가 접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판매량 정보다. 이따금 대형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이 자체 판매량 순위를 내놓기는 하지만 지엽적인 수치라 전체 시장으로 확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해외 시장에서는 GfK나 IHS마킷 같은 다국적 시장조사업체들이 가전제품 판매량을 파악한다. 휴대폰은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가 글로벌 시장과 주요 시장의 판매량을 집계한다. 국내에서도 GfK와 IHS마킷 등이 제조사와 유통망 등을 통해 가전 물량을 파악하지만 비공식적인 자료다. 시장조사업체들이 도출한 이 같은 자료를 제조사들은 내부 영업용으로 활용한다.
일부 제조사들은 치열하게 경쟁하는 제품의 경우 판매 관련 자료를 아예 시장조사업체에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발표조차 되지 않는 시장조사업체의 비공식 집계 역시 국내 시장을 온전히 투영하기에는 불완전하다.
제조사들은 “가전은 제품군이 너무 많고 세부모델까지 다양한데다 유통 채널이 다변화돼 판매량을 집계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게다가 경영실적도 아닌 판매량을 기업이 구체적으로 공표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대우전자가 29일 “출시 2개월 만에 클라쎄 건조기가 3,000대 넘게 판매됐다”고 밝힌 것처럼 제조사들이 스스로 판매량을 공개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우전자는 지난달 대유그룹에 인수되기 전부터 전자레인지나 김치냉장고 등의 판매량을 꾸준히 공개했는데, 들여다보면 삼성ㆍLG전자와 경쟁하지 않는 소형 가전들이다.
LG전자도 판매량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가전제품이 있다. 의류관리기 스타일러와 무선청소기 코드제로A9이다. 스타일러는 LG전자가 개발해 2011년 국내에 처음 선보여 라이벌이 없는 독보적 1위이고, 무선청소기는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보다는 영국 다이슨과 경쟁하는 제품이다. QLED TV를 앞세운 삼성전자와 올레드TV의 LG전자가 점유율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글로벌 프리미엄 TV 시장처럼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국내 가전시장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약 90%를 점유하고 나머지 업체와 수입 제품이 10% 정도를 차지한다는 게 통념이다. 절대 양강이라 가만히 있어도 1등 아니면 2등이라 굳이 판매량으로 경쟁자를 자극할 필요가 없는 구도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한 제품일수록 판매량을 내세워 치고 나오면 프로모션 대결로 흐르게 돼 서로가 손해일 것”이라고 했다.
많이 팔리는 가전이 최고의 제품은 아니다. 구매자의 생활 패턴과 소득 수준에 따라 최고의 제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시장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제품에는 가격이든, 성능이든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내 소비자는 현명한 소비를 위한 정보 하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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