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터만 200이닝 이상 소화
ML서도 단 15명에 불과
든든한 선발 투수 ‘귀하신 몸’
마운드를 든든하게 책임지던 '이닝 이터'가 사라졌다.
지난해 KBO리그에서 2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는 KIA의 헥터 노에시(31) 단 한 명이다. 2016년까지 범위를 넓혀도 200이닝을 던진 선수는 2년 연속 기록의 헥터를 제외하곤 메릴 켈리(30ㆍSK)와 양현종(30ㆍKIA)에 불과하다. 2016시즌 양현종의 한 시즌 200⅓이닝 투구는 2007년 류현진 이후 국내 선수로선 9년 만의 기록이었다.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선발 투수가 줄어들다 보니 상대적으로 불펜의 중요성이 커졌다. 2007년부터 4년간 KBO리그에서 SK 왕조를 구축했던 김성근 감독의 ‘벌떼 야구’는 불펜 투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다. 이후 등장했던 삼성의 전성기도 정현욱-안지만-오승환 등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불펜진이 있어 가능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며 국내 야구에선 불펜 역할이 크게 두드러졌다.
마운드 중심이 선발에서 불펜으로 옮겨가고 있는 건 미국 메이저리그(MLB)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MLB에서 200이닝 고지에 오른 투수는 15명으로 2005년 50명에 비해 크게 줄었다. 선발 투수의 경기당 평균 소화 이닝은 5.5이닝에 불과했다. 이닝이 줄어들다 보니 선발 투수의 퀄리티스타트 확률도 절반에 못 미친 44%를 기록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26일(현지시간) 최근 미국 야구팬들 사이에서 선발 투수보다 불펜진을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한다는 뜻의 단어 ‘불페닝(Bullpenning)’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고 전했다.
‘불페닝’은 선발 투수가 많은 이닝에 나와 공을 던지면 그만큼 약점이 노출돼 경기를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실제로 지난해 MLB 타자들은 선발 투수와의 첫 타석에선 0.731의 평균 OPS(출루율+장타율)를 기록했지만, 같은 선발 투수를 상대로 한 세 번째 타석에선 0.801의 OPS를 거뒀다. 동시에 투수들의 볼넷 당 삼진 비율은 2.83에서 2.22로 하락했다.
불펜 투수가 등장한 경우엔 달랐다. 경기에 새롭게 등판한 불펜 투수는 타자들의 평균 OPS를 0.720까지 떨어뜨렸다. 선발 투수가 계속 던졌을 땐 18%에 불과했던 삼진 확률도 24%까지 올라갔다. 기존 투수에 익숙해져 있던 타자들이 갑자기 등장한 불펜 투수를 낯설게 여긴다는 의미다. MLB에선 마운드 운용 폭을 넓히기 위해 10일짜리 부상자 명단(DL)을 이용하기도 한다. 더 많은 선수를 엔트리에 등록해 불펜으로 기용하기 위한 꼼수다.
승리를 위해선 ‘불페닝’이 통계상으로 효율적이지만, 여전히 선발 투수 중심의 야구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시즌 200이닝을 책임졌던 MLB 탬파베이의 투수 크리스 아처(31)는 21일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경기가 점점 평범해지고 있다”며 불펜으로 마운드 중심이 쏠리는 현재 상황에 아쉬움을 표했다.
과거 국내 야구에도 ‘무쇠팔’ 최동원, ‘고무팔’ 선동열 등 한 경기를 완벽하게 책임졌던 투수가 즐비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보다 경기 수가 적었던 1980년대엔 한 시즌 5~6명의 투수가 200이닝 이상 마운드를 책임졌다. 하지만 지난해 KBO리그 선발 투수의 경기당 소화 이닝은 평균 5.34이닝에 그쳤다. KBO리그에도 과거와 달리 ‘불페닝’ 바람이 불고 있다.
‘불페닝’이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이닝 이터’는 귀한 몸이다. 야구팬들도 경기를 책임질만한 든든한 선발 투수에겐 더욱 열띤 응원을 보낸다. 이번 시즌엔 헥터, 양현종을 포함해 팻 딘(29ㆍKIA), 로건 베렛(28ㆍNC), 유희관(32ㆍ두산) 등이 200이닝 투구를 목표로 삼고 새롭게 시즌에 나섰다. 200이닝 이상 책임질 새로운 ‘이닝 이터’가 등장할지 기대를 모은다.
박순엽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